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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 증오

김곰곰 2012. 3. 4. 23:47
보아라, 우리 시대에 증오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자신을 가꾸고 관리하는지.
높은 장애물을 얼마나 사뿐히 뛰어넘는지.
도약하고, 덮치는 것이 그에겐 얼마나 수월한 동작인지.
 
 
다른 감정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래된 것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이기에.
스스로 원인을 양산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싹틔운다.
어쩌다 잠들어도,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 아니다.
불면은 힘을 앗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보태어줄 뿐.
 
 
종교 탓이건,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인건ㅡ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고서
출발선에 나아가, 앞으로 뛰어갈 준비를 한다.
조국 때문이건, 그 밖의 다른 이유에서건ㅡ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질주하기 위해 벌떡 일어선다.
출발 단계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고 정의도 함께하지만
결국에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건 증오 혼자뿐.
 
 
증오. 증오.
그 얼굴은 사랑의 황홀경으로 
일그러지고 만다.
 
 
누추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다른 감정들.
언제부터 '박애'가
군중들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는가?
'연민'이 단 한번이라도
결승점에 제일 먼저 도착한 적이 있었던가?
'의심'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장악한 적이 있었는가?
오직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증오만이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
 
 
영리하고, 재치있는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하구나.
증오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작곡했는지 꼭 말로 해야만 하나?
두꺼운 역사책 속에서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차지했는가?
얼마나 무수한 광장과 스타디움에
인간의 시체로 카펫을 깔았는가?
 
 
자, 이제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서로를 속이는 일 따위는 그만두자.
캄캄한 밤, 증오의 홍조가 찬란히 빛난다.
장밋빛 여명에 폭발하는 연기는 장대하기 그지없다.
폐허의 존엄함을 맛보고 싶은 은밀한 유혹,
그 위에 굳건하게 솟은 우람한 기둥 끝에서
음탕한 유머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자못 힘겨운 일.
 
 
증오는 대비의 명수다.
소란과 정적,
새하얀 눈 위에 시뻘건 핏자국,
추레한 희생자 위에 우뚝 선 단정한 살인자의 모습은
증오가 결코 싫증 내지 않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증오는 새로운 임무에 항시라도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끈질기게 기다린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증오가 장님이라구? 천만의 말씀.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
오로지 증오뿐이다.
 
 
 
 
 
 
 
 
 
 
 
 
 
 
 
-
증오, 끝과 시작(대산세계문학총서 062).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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