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을 완성할 때쯤이면 마음도 정리되어 앞으로 나갈 길을 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방세를 낼 돈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도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글을 완성하는 것이 마음을 정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듯했다. 그는 2년이 넘도록 같은 문장을 반복해 써 내려갔다. '아버지를 죽였다. 실수였다, 아니라 실수가 아니었다, 아니다 실수였다.....' 문장을 쓰다 보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문장으로만 존재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뒤에 쓸 문장을 생각해보았지만 어떻게 써야 앞의 문장이 주는 충격을 덜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실수하는 인간, 정소현. 문학과지성사.
평범하고도 특별한 어느 날에야 내가 단지 한 사람이 된다. 그럴 때에는 다른 날보다 행복하게 눈을 뜨고, 그리고 은총이 충만함을 느낀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다른 날들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가 있다. 한 번에 여러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날들. 누군가의 언니였다가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내였다가 누군가의 이웃이었다가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한 날들. 나는 당신의 나, 혹은 그들의 나일 뿐이다. - 생물성, 신해욱. 발문, 김소연. + 김소연 시인님이 써주신 발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같은 이름의 평론가가 계신가. 그러나 저 문장은 내가 느끼는 김소연 시인님 같다. 갑자기 평생 하나의 장르만 읽어야 한다면 모국어로 된 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뒤엉킨 말, 먹고 싶다한 말의 감옥이 내 얼굴을 변하게 한 공포가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러나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조차 버리고안녕..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비행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 사진 속 책은 니체의 말. 다행인지 아직까지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먹고 사는 '일'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아마도 계속해서 책 옆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건 타인의 인생을 망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풍경 (중략) 3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말을 들어 자정으로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 풍경.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한 사람마다의 행운이나 불행도.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열등감을 가졌던 쪽은 당신의 언니였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한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ㅡ특히 아버지와ㅡ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중략) 장식장에 진열해두었지만, 마치 냄새가 싫은 음식을 꺼리듯 자신의 인생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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