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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열등감을 가졌던 쪽은 당신의 언니였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한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ㅡ특히 아버지와ㅡ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중략) 장식장에 진열해두었지만, 마치 냄새가 싫은 음식을 꺼리듯 자신의 인생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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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








 그러나 그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야근과 밤샘을 반복해야 하는 감사 시즌이 닥쳐오고 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상황이 더 나빠졌고, 그 여자의 아들은 지금 혼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그 여자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여자가 만삭이었을 떄, 남편이 첫 면접 때 맬 넥타이를 사러 밤늦은 거리를 헤맨 적이 있다. 마치 좋은 넥타이를 고르는 일에 다음 날 면접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처럼 그 여자는 부른 배를 안고 여러 가게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수없이 남편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고, 가격을 비교하고, 그 허공의 사람에게 셔츠를 입히고 넥타이를 대보았다.

 몇 차례의 실망이 지나간 뒤에야 그 여자는 남편이 직장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는 또래보다 학위가 늦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특별하게 친화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고유한 개성이라고 불러야 할 독특한 무심함이 있었는데, 그 체념에 가까운 무심함 덕분에 어떤 좌절이나 분노도 조용히 비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열정이나 연민, 깊고 끈끈한 사랑까지 침착하게, 씁쓸히 지나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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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










(더 견딜 수 없는 건, 이렇게 내 삶이 지나가고 있다는 거야. 벌써 꽤 많이 지나가버렸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너는 모를 거야.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자신의 상태에만 몰입해 있던 사람이 문득 그 밖으로 빠져나올 때 지어 보일 수 있는 가장 방심한 표정을 나는 그날 보았던 것 같다. 




내 뜻과는 관계없이 내 몸이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몸이란 원래 제 나름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아는 나와 함께 재미있어하며 그것들을 들여다보지만, 나처럼 황홀해하지는 않는다. 저런 것들을 믿으면 안 돼, 라고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말 한 적이 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아파.

나직이 소리 내어 인아가 따라 웃는다.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것이 아주 오래전, 그녀가 위태롭게 어두웠을 때, 단 하룻밤의 몇 시간 동안 허락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일을 겪은 뒤에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환영처럼 잠시 이뤄지거나 단박에 파괴된 뒤에도, 검은 바다의 밑면 같은 거리를 한 걸음씩 못을 치며 나아가는 일만 남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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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우파










원고를 다시 읽기로 한다. 그러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형편없는 것을 쓰는 일에 긴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어젯밤 은희 언니의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이 원고를 의심 없이 넘기고 출국했을 것이다. 그녀의 소식이 내 의식을 꿰뚫으며 구멍을 만들었고, 그래서 별안간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대충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수술 후 삼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한 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기름 없이 볶은 새송이버섯과 데친 두부, 두 가지 나물과 현미밥 반 공기를 막 식탁에 차렸을 때 윤이가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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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지기 전에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곤 했으며, 일단 깨고 나면 무수하게 만져지는 어둠의 겹, 예민한 수면의 마디들을 일일이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야근이 잦은 편이고 출근 시간이 이른 그에게 숙면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서서히 체중이 빠졌고, 더욱 서서히 말수가 줄었다. 그 변화가 워낙 완만했기에 아내를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문이 보였다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 내가 죽을 수 있었다면, 누군가를 죽일 수 있었다면 바로 그날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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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그러니까 저 나무들이었습니다. 아니, 바로 저 나무들은 아니었지만 이른 봄의 저 연둣빛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아팠던 여자가 산월이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가 아픈 것처럼, 저 나무들이 다시 두려워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중략)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당신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내 뺨을 쓸어내리는 당신의 먹 묻은 손에 나는 한 번 더 입맞추었습니다.

어서어서 커. 

당신이 웃으며 건넨 말에 우리는 함께 오래 웃었지요. 웃음 끝에 당신은 쾌활하게 말했습니다.

궁금해, 네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갈지. 늙어가는 모습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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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그의 말에 배어 있는 무관심, 의무, 조용한 위선을 나는 듣는다.

잘 다녀와.

나는 웃는다.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중략)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블라블라) 악화될 때는 냄비나 주전자, 심지어 머그컵조차 혼자 다룰 수 없어 일일이 남편을 불러야 했다.

무의미한 반성들은 그 과정에도 뒤따라왔다. 재활치료에 지나치게 열심이었던 것, 빠른 회복에 집착했던 것, 그래서 마치 완전히 회복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개선되어야 할 내 습성은, 때로 균형을 잃을 만큼 맹목적인 의욕.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면 세 개는 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범생 기질. 폐 끼치는 것을 정도 이상 싫어하는 결벽성.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매순간 나는 삶과 자신 사이에 생겨난 거리를 느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헐거움이었다. 애잔히 찰랑거리는 감정, 사랑, 연민 따위. 환성과 주관성, 소위 정이라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감정들이 증발되었다. 








모든 애착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실에 대한 애착만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중략)

사고에서 깨어났을 때, 살아난 것을 불행 중의 가장 큰 다행으로 여기며, 회복되고 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작업이었다. 세상의 어떤 즐거운 일들조차 나에게 극히 부수적인 것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내가 마음으로 작업을 포기한 것은, 퇴원하고도 한참 뒤, 오른손마저 망가졌음을 알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나는 나름대로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보이고 들리며 기억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충격적인 이물감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늘 밑그림으로 함께했던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당신 얼굴만 보면 미쳐버리겠어. 뭐야, 나는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죄로 내가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거지?

알잖아. 나에게는 손이 없어.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당신을 사랑했겠지만. 어깨를 주물러주고, 발이며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웃었겠지만. 그러고 나면 모든 불화가 멈추었겠지만. 좋아하는 콩나물밥을 함께 해 먹고. 야, 양념장이 정말 맛있어, 라고 당신이 말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간절히 뻗어, 밤늦도록 사랑을 나누면 그만이었겠지만. 








나는 당황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황홀하구나. 그들의 거짓 없는 환대가 서름서름하게 느껴진다.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나는 조금의 경제력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죽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나의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고작 서른세 살에 붓을 꺾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고 있다. 단지 숨 쉬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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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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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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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나 숲이나 모래언덕. 한강과 편혜영과 아베코보. 삶 아주 가까운 곳에 체념과 굴레. 그걸 투영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장소나 사람의 몸. 너무나 매력적이다. 미소한 일상을 나열한 글만 좋아할 때는 내가 이런 글에 매혹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전혀, 꿈에도.

 여행갈 때 무슨 책을 가져갈까 정말 고민했는데 우연이든 이끔이든 미끄러진 거든 내 손가방에는 여행 책 대신 철학 책 대신 소설 책이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여행 내내 한권 밖에 없는 책이라 오랫만에 한자 한자 씹어가며 읽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중앙역 옆에 빨간 벽을 가진 이층침대의 일층에서.

이런 글을 쓰고 싶기도 하고 평생 쓸 수 없기도 할 것 같다. 죽다 살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뭐가 되도 좋으니 무언가 쓰고 싶을까? 그런데 과연 난 뭘 쓸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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