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우리의 참을성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우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래의 일인데도 그 일을 계기로 이 집에 시집오고 나서 이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고부 사이를 평화롭게 유지시켜주던 불간섭주의랄까, 쿨한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유를 사고할 수 있게 하는 게 돈의 힘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참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양념이 다닥다닥 붙었지만 고춧가루나 고추장 양념은 배제한, 순 서울식 북어구이는 오븐에서 십 분 안에 그 부드럽고 순한 맛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닭가슴살이 들어간 야채샐러드에 곁들인 드레싱은 시어머니 비장의 솜씨일 터. 갈비찜이나 회 같은 비싼 음식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임의 성격상 손님들이 미안해..
요즘 보기 드문 조선기와 지붕이라느니 아니 양기와일 거라느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품위 있어 보이는 데 비해 유지하기가 힘들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다 틀린 말이다. 원래 있던 초가 지붕을 걷어내고 올린 지붕은 조선기와도 양기와도 아닌 합성수지로 만든 가짜 기와이다. 공장에서 지붕 형태로 통째로 찍어나온다. 합성수지는 가볍고 힘이 세다. 이번 수해에 집이 형체도 없이 유실됐다 해도 지붕만은 끄떡없이 먼바다까지 떠내려갔을 것이다. 나는 마모도 소멸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병적이고도 비밀스러운 혐오감을 갖고 있었지만 관리하기에 편하고 저렴한 것을 선호하는 남편을 말리지 못했다. 술 먹고 들어오면 오늘도 안 내다버렸냐고 생지랄을 하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정말 내다버렸어요. 전부..
그걸 쳐다본다는 건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 테고 내가 청승을 떨면 식구들이 나를 불쌍해할 것 같아 싫었다. 나의 최초의 자의식이었다. 내 눈엔 영원히 펄펄 날아다닐 것처럼 보이던 할아버지가 동아줄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안간힘을 쓰는 걸 본다는 것은 환멸과 비애의 극치였다. 불쌍한 할아버지, 그때 할아버지에게 위로가 된 건 그들의 신바람이나 덕담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끼쳐오는 타관의 냄새가 아니었을까. 내가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에서 대처의 냄새를 즐겼듯이. 돌이켜보면 기억의 가장 밑바닥, 취학 전 시골에서 보낸 유년기는 온통 칭찬받고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는데, 그건 내가 특별히 귀염성 있거나 출중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밑에 동생이 없고 생길 가망도 없는데다가 오빠와 십 년이라는 나이 차이 사이에는 삼 남매..
오늘이 3주기. 돌아가셨다고 배너 걸어야한다고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내 분야는 아니지만 가슴이 아프고 또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선생님의 글을 못읽은 사람들을 위해서 거는 배너지만 어쩐지 돌아가셨는데 배너를 걸고 책을 전면에 펼쳐놓는다는 것이. 비단 박완서 선생님 말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 생겨야만 책을 읽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씁쓸하다. 사람의 뇌는 긍정적인 것보단 부정적인 것에 강하게 자극을 받는다고 하던데 탄생이나 수상보다 죽음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올해, 아니 작년에는 정신이 없어서 못꼽아봤는데 나의 2013 베스트 오브 작가는 박완서 선생님. 개인적으로 그 남자네 집, 나목 이후로 못읽고 있던 책들을 박완서 전집의 2..
오늘 하루 쓰잘데없이 애만 썼다는 사소한 허전함이, 일생을 헛산 것 같은 거대한 허전함이 되어 그녀를 한없이 미소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가망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 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렇게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까지 안 살아도 될 만한 연금을 받고 있는 남편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 마냥 얽매여 있으려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목구멍으로 뜨겁기 치받쳤다. 그녀는 세월의 때가 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 정강이의 모기 물린 자국을 가만가만..
+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 남자네 집, 만큼은 너무나 남아있는 소설이다. 그 덕분에 성과 신이라는 평범한 학교의 그 골목들이 생경하게 빛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오늘도 '좋다'와 '싫다' 사이에 좋지 않다, 싫지 않다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순간이 있었는데 둘로 명쾌해질 수 없다면 이분법으로는 나눌 수 없는 수많은 스펙트럼을 찰떡 꾹꾹 눌러 썰듯이 많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소설가인가 당연히 옹색하고 구질구질했다. 내성적인 아이가 흔히 그렇듯이 상상력으로 고독을 달래는 꿈 많은 아이가 되었다. 우리 식구 중 나는 유일한 노동력이었고 꽃다운 스무 살 대학생이었다. 여자였지만 젊은만으로도 더럽고 잔혹한 세월의 좋은 먹이였다. + 이바라키 노리코/내가 가장 예뻤을 ..
국제도서주간입니다.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의 책을 집어 들고, 52페이지를 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문장을 '상태 Update Status'에 포스팅합니다. 책 제목은 알리지 마시고 이 규칙도 당신의 상태 status의 일부로 옮겨 주십시오. 제가 마흔 나이에 소설을 처음 쓸 적에도 당선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식구들 앞에 자존심 문제도 있으니까 식구들 몰래 밤에 많이 썼습니다. -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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