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이 없지는 않지만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면 언제나 쓸데없이 많은 걸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물건을 사곤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랑이 패드를 산다길래 나도 책 열심히 읽고 공부할지도 모르니까 하고 덥썩 샀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겨울이 온 줄 알고 한국에서 부랴부랴 온수매트랑 난방텐트도 샀다. 옷의 가짓수가 없어서 외출복을 잠옷으로도 입었더니 빨래를 너무 자주해야하는데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나 들어오니까 볕이 좋을 때 빨래를 말릴 수가 없어서 곤란했다. 그래서 나 잠옷이요 하는 겨울 잠옷도 샀다. 바다에 가서 물놀이 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워서 책 읽고 쉬는 사람도 많아서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짐이 ..
습설 사람, 질리게 봐온 사람들이다. 검소함과 추레함의 차이, 실제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차이, 속 빈 자들의 끝 간 데 없는 기고만장함. 이제껏 살아왔을,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어떤 삶을 몇가지 행동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뽀득뽀득한 삶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실은 그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도 안다. 볼을 벼리는 추위를 참고, 얼어버린 나뭇가지가 된 손가락으로 찍었을 설원의 한 컷을, 난방 잘된 전시관에서 편히 보는 것. 보는 사람. 참 좋군. 폭염 속에서 우연히 본 어느 농가 처마에 달린 고드름 사진. 저긴 참 좋군. 구석에 수년간 작동하지 않았을 혹은 못했을 녹슨 경운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 그렇지. 알고 있었다. 신념에 의한 자발적 가난이 아니라 노력해도 벗어나기 힘든 비자발적 가..
남편의 아버지가 묵직해 보이는 짐을 들고 후덥지근한 목장 한가운데로 걸어왔다. 안에 멜론과 복숭아가 들어 있다고 한다. "왜 그런 걸 가져왔어요." 남편은 어린애처럼 골을 냈다. 그렇게 말하는 심리는 나도 잘 안다. 부모가 엉뚱한 일을 하면 괜히 그런 말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 먹을 기회를 놓쳤다. 시아버지는 들고 가서 신칸센에서 먹으라고 했다. 남편은 들고 가기 무겁다며 싫다고 했다. 나는 "이 무거운 걸 아버님이 힘들게 들고 오셨는데, 가져가요." 하고 말했다. 이런 때 중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밖에 없다. 신칸센은 탄 후에는 선반에 올려놓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복숭아가 짓물러 있었다. 아래쪽은 거무죽죽하고 위쪽만 멀쩡했다. 냉장고에서 허둥지둥 꺼낸 탓에 시아버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부모님의 뒤를 잇고 싶지 않아 엄청나게 절약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는데, 그의 생활은 실제로 그런 느낌이었다. 대학 시절에 돈을 모아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지 않으면 싫으나 좋으나 롤 케이크를 구워야 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절박함이 이었다. 앞날이 정해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고단함이 그의 아르바이트 인생에서 묻어났다. "나는...... 나는 정말 마음씨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알아."길거리를 같이 걷기만 해도 그의 반듯한 성장 과정과 고운 마음씨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령 공원을 거닐 때,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빛도 흔들린다. 그러면 그는 아스라한 눈으로 '아, 좋다.'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저런, 넘어졌네.' 하는 표정을 짓고, 그 아이를 엄마가 안아 일..
아직 제 손으로 껍질을 까지 못하는 꼬맹이는 식사를 함께한 친구가 꼼꼼하게 깐 포도 알을 받아먹으며 방실거렸다. 포도 껍질을 까 주는 것, 잠시 차에 태워 주는 것. 누구나 주위 사람들의 이런 자잘한 애정에 힘입어 성장하는 것이라. - 바나나 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민음사 - 1987년 부터 프로작가로 일했다니 대단한 공력이다. 새삼. 내가 85년에 태어났는데 벌써 전업 작가로 26년이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쓰고 찍히고 읽히고. 비판은 자못 어려운 일이지만 비난은 쉽다. 단순히 호오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물론 나도 내가 중히 여기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말하는 결례를 범하기도 한다. 못생긴 연예인은 정말 인정할 수 없어 라던지, 후후. 다시 돌아가서 "우리 삶..
남편의 아버지가 묵직해 보이는 짐을 들고 후덥지근한 목장 한가운데로 걸어왔다. 안에 멜론과 복숭아가 들어 있다고 한다. "왜 그런 걸 가져왔어요." 남편은 어린애처럼 골을 냈다. 그렇게 말하는 심리는 나도 잘 안다. 부모가 엉뚱한 일을 하면 괜히 그런 말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 먹을 기회를 놓쳤다. 시아버지는 들고 가서 신칸센에서 먹으라고 했다. 남편은 들고 가기 무겁다며 싫다고 했다. 나는 "이 무거운 걸 아버님이 힘들게 들고 오셨는데, 가져가요." 하고 말했다. 이런 때 중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밖에 없다. 신칸센은 탄 후에는 선반에 올려놓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복숭아가 짓물러 있었다. 아래쪽은 거무죽죽하고 위쪽만 멀쩡했다. 냉장고에서 허둥지둥 꺼낸 탓에 시아버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그런 모습이 듬직하기도 하고 조금은 애처롭기도 했다. 마치 공유하는 것처럼 지내고 있지만 나만의 무거운 문제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든 혼자서 해 왔지만 사실은 사춘기 때도 보살핌을 받고 싶었나 봐. 어디를 가든 누가 같이 가 주고, 함께 생각해 주고, 끈기 있게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지만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원한 것은 아마도 그뿐이었으리라. 그것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가정이 붕괴된다는 건 원래 있던 것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이런 미래가 오려나, 하면서 모두가 막연하게 품고 있던 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고, 들판에 내버려져 점차 헐벗어 가는 것이다. 나만큼 크게 망가진 사람도 좀처럼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는 정말 괴로운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중략) 사람의 약점은 저마다 다르다. - 그러고 보니 웃으면서 밤길을 걸어 돌아올 때,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아주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나날도 이제는 끝이다. 헤어질 때가 되면 늘 좋은 일만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추억은 언제나 특유의 따스한 빛에 싸여 있다. 내가 저세상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육체도 저금통장도 아닌 그런 따스한 덩어리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세계가 그런 것들을 몇 백 가지나 껴안은 채 사라진다면 좋겠다. 이런저런 곳에 살면서 쌓인 갖가지 추억의 빛을 나만이 하나로 이을 수 있다.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목걸이다. - "흠, 그렇구나. 너, 뭐 좋아하는 건 있어?" "오코노미야키 굽고 야키소바..
그 광경과, 그것을 보았을 때의 내 기분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그 후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이면에서 그 충격과 비슷한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아무리 평화로운 풍경이라도 그 뒤에는 위태로움이 숨어 있으며, 우리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음에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결부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중략) 어떤 사람도, 아무리 단단한 일상도, 커다란 힘이 가해지면 한순간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 훗날 엄마를 만날 수 없어 괴로울 때면 늘, 그 우악스럽게 내리누르던 손바닥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상상 속에서 그 손은 항상 어둠 위에 하얗게 떠서 내 생명이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중략) 그 손이 포악한 힘으로 나를 되밀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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