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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우리의 참을성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우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래의 일인데도 그 일을 계기로 이 집에 시집오고 나서 이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고부 사이를 평화롭게 유지시켜주던 불간섭주의랄까, 쿨한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유를 사고할 수 있게 하는 게 돈의 힘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참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양념이 다닥다닥 붙었지만 고춧가루나 고추장 양념은 배제한, 순 서울식 북어구이는 오븐에서 십 분 안에 그 부드럽고 순한 맛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닭가슴살이 들어간 야채샐러드에 곁들인 드레싱은 시어머니 비장의 솜씨일 터. 갈비찜이나 회 같은 비싼 음식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임의 성격상 손님들이 미안해할까바 안 차렸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그 대신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다. 가지 나물도 그렇고 알찌개도, 온갖 야채가 고루 들어간 부침개도 그렇다.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며느리 손 안 빌리고 당신 혼자서 완벽하게 차려놨다는 자부심으로 쌩쌩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시어머니 주변을 나는 헛되게 맴돈다. 내가 할 일을 찾아낼 수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를수록 얼굴만 달아오른다.
시어머니 생각으로는 그거야말로 센스의 문제일 터. 그러나 센스야말로 간섭을 가장 싫어하는 원초적인 감수성이라는 걸 그는 알까.
엄마, 엄마가 무슨 재판관이에요. 따질 걸 따지세요. 우린 서로 같이 사는 데 멀미가 났을 뿐이에요. 우린 둘 다 어엿한 성이라구요.
글쎄, 누가 먼저 멀미를 냈냐니까.
어느 날 내가 멀미를 내고 있다보니 그 친구도 멀미를 내고 있더라고요. 멀미나는 차는 빨리 내리는 게 수지 누가 먼저 멀미가 났냐는 따져서 뭐하게요.
됐어요,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건지 내 소매를 끌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다. 그러고는 액세서리 파는 데서 장난감 같은 팔찌와 귀고리 목걸이 들을 성의 없이, 마치 쓸어담듯이 골라잡았다. 그래봤댔자 귀금속에다 대면 몇 푼 안 되지만 쓰잘 데 없는 것들을 하도 여러 개 사는지라, 얘야, 하나를 가져도 값 나가는 걸 가져야지 그따위 것들 아무리 많아봐야 아쉬울 때 하나도 도움 안 된단다, 했더니, 세미가 그 동그랗고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럼 궁할 때 팔아먹으라고 저한테 패물 해주려고 하셨어요? 이러는 거였다. 참 맹랑한 아이구나 싶기는 했지만 욕심스러운 아이는 아닌 것 같은 게 마음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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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박완서. 문학동네.
+ 이 중단편은 2008년에 나온 글인데 선생님의 맨 처음 소설 나목에서 부터 이 글까지는 한참 멀리 떨어져있는 시간인데도 글의 맛은 찰진 것이 예전 같고 그때나 지금이나 시원한 데를 긁어주면서도 고상한 것이 세련되었다고 늘 생각한다.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통속의 속에 있으면서도 치우침이 없어서가 아닐까. 읽으면 읽을 수록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너무 좋다. 어휘가 풍부하고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작가 중에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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