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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motivation 관심

스미레

김곰곰 2010. 1. 22. 13:48
 "너, 요즘 들어서 만날 때마다 알아보기 어렵다."
 내가 말했다.
 "그런 시기야."
 그녀가 스트로로 주스를 빨아들이면서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했다.
 "어떤 시기인데?"
 내가 질문을 던졌다.
 "때늦은 사춘기라고 해야 되나.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 자칫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따돌림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거 아냐?"
 "그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나는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야?"
 "2,3일 정도라면 내 아파트에 머물러도 좋아. 너 자신을 잃은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스미레가 웃었다.
 "농담은 그만둬."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모르지. 어쨌든 너는 담배를 끊었고, 청결한 옷을 입게 되었고, 좌우의 짝이 맞는 구두도 신게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구사하게 되었어. 와인을 선택하는 방법도 배웠고, 컴퓨터도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어. 그러니까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그리고 소설은 여전히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있어."
 "모든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 거야."
 스미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이런 것도 일종의 변절이라고 생각해?"
 "변절?"
 나는 일순, 그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변절, 신념이나 주장을 바꾸는 것."
 "즉, 취직해서 세련된 옷을 입고 소설 쓰기를 포기한 것?"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썼던 거야. 쓰고 싶지 않으면 쓸 필요가 없어. 네가 소설 쓰기를 그만둔다고 해서 도시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냐.(이 부분이 쓸쓸한 거지만) 배가 침몰되는 것도 아니고, 밀물과 썰물에 변화가 발생하는 것도 아냐. 혁명이 5년 늦어지는 것도 아니라구. 그런 건 아무도 변절이라고 부르지 않아."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최근 들어 단순히, '변절'이라는 단어를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 이유는 유행에 뒤떨어져 쇠퇴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딘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코뮌으로 간다면 사람들은 그걸 변절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사정은 나도 잘 몰라. 내가 알 수 있는 건 만약 네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면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거야."

(중략)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건 아냐."
 스미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쓰려고 해도 아무것도 쓸 수 없어. 책상 앞에 앉아도 아이디어나 언어, 감흥이나 경치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단 한 개도. 얼마 전까지는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게 묻는 거야?"



한 참 건너띄고 이어서 마지막.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같은 세계의 달을 보고 있다. (1Q84의 모티브가!) 우리는 분명히 하나의 선으로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끌어 모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두 손바닥을 바라본다. 나는 거기에서 피의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피의 흔적은 없다. 피냄새도 없고 딱딱한 긴장도 없다. 그것은 이미 어딘가로 깊이 스며들어 가버린 것이다.












-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대표님 책장에서 발견한 스푸트니크의 연인.
하루키 책 가운데 안읽은 것,
고독한 자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댄스 댄스 댄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우천염천. 음, 쓰고 보니 꽤 많네. 몇 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안읽은 책 중에 하나인 스푸트니크의 연인. 이 책은 이제 절판이라 부천점에 두 권이 있을 뿐이라 그마저 누가 사간다면 도서관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데 마침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직 시작도 안하고 무심코 펼쳐든 부분에 스미레와 누군가의 대화가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금새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청소년기의 독서습관과 작가는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좋고 싫은 취사 선택에 앞서 매우 깊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그 때로 돌아가버린다. 다른 면을 보고 감탄하지만 그 시절에 흠모했던 문체라든가 그 글을 읽을 때의 주변의 공기 냄새, 무게 같은 것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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