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너, 요즘 들어서 만날 때마다 알아보기 어렵다." 내가 말했다. "그런 시기야." 그녀가 스트로로 주스를 빨아들이면서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했다. "어떤 시기인데?" 내가 질문을 던졌다. "때늦은 사춘기라고 해야 되나.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 자칫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따돌림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거 아냐?" "그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나는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야?" "2,3일 정도라면 내 아파트에 머물러도 좋아. 너 자신을 잃은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스미레가 웃었다. "농담은 그만둬."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모르지. 어쨌든 너는 담배를 끊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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