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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의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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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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