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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일기

와서 아침을 드시오

김곰곰 2015. 4. 8. 00:44

와서 아침을 드시오. 

요한 21, 12



윤민열 스테파노 신부 - 2005년 9월 9일 수품 



 유다와 베드로. 둘 다 똑같이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그 배신에 경중이 있을까요? 다만 유다는 주님을 포기했고 베드로는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포기하고 자결한 유다는 저주받은 이름이,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역사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금 저를 초대하실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시듯이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침 식사로의 초대가 아니라, 죄의 용서이며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죄인에게 이 기회는 어두군 동굴 저편에 비춰지는 밝은 빛이요 기쁨입니다. 



+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슬픔이 턱까지 차고 오른다. 그리고 눈이 찌르르해지고 울기엔 좀 애매한 기분에 큰 숨을 한 번 쉬고 눈물을 삼킨다. 나의 마음이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면 자주 화가 나는 것 같다. 온유함이 사라지고 무엇이든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어진다. 화를 내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면 다음에는 곤란함을 겪는 일이 생기기 때문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순간에 아이러니하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된 것만은 감사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회사의 구성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나를 대신해 누군가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게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 우리 할머니는 한 분이고 엄마와 이모가 밤과 낮으로 병실을 지키는 걸 도울 수 있다. 다행히 그런 걸 할 수 있도록 시간과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곳에 있다. 이런 단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할머니가 혹시나 돌아가신다면 회사 이름으로 나오는 컵이나 그릇, 도와줄 동료들, 회사 이름으로 오는 부조금은 없겠지만 그런 것 대신 시간이 있다.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할머니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뭔지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말씀도 잘 하시고 눈도 잘 뜨고 있고 손도 제법 움직이고 수저를 직접 움직이실 수 있게 됐던 게 불과 한달 전인데 왜 이렇게 갑자기, 점점 나빠지는지 알 수 없다. 당연할 땐 당연해서 잘 모르던 것들이 지나고나면 언제나 후회가 된다. 이번에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말도 한마디 하기 힘든데 어제 할머니가 엄마와 이모를 보고 "밥 먹었나" 하고 물으셨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작년 구월부터 제대로 된 밥 한 입을 넘기지 못하고 계신데도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숨을 내쉬고 있는데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두 딸의 식사를 걱정하신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까타로워서 아주 오랜시간 동안 아침, 점심, 저녁 식사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살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요리하는 것에 흥미도 없고 잘 드시질 않았다. 언제나 조금은 살찌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맛있고 좋은 걸 먹으러 다니고 싶어했다. 할머니는 걷고 다니고 싶어했다. 그런 것에서 에너지와 이야기를 얻어오는 사람이었다. 볕이 잘 드는 집에서 꽃과 나무를 키우는 걸 좋아했고 우유, 물, 요구르트 뭐든 마시는 걸 참 좋아헀다. 최근까지도 배즙이나 오렌지쥬스는 아주 조금 드시기도 했다. 그렇게 밥과 관련해서는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힘이 많이 든 순간에도 자식과 할아버지 밥을 걱정하다니 나는 너무 눈물이 났다.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는 그 물음에 엄마를 위해서라도 밥을 먹겠다는 씩씩한 엄마를 보는거나 눈물이 나서 밥을 못먹겠다는 이모를 보는거나 마음이 아프긴 똑같았다. 밥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오래까지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할머니를 신경쓰게 하는 걸까. 어미가 자식에게 주는 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큰 사랑, 아침 먹고 나가라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밥은 먹고 다녔냐 하고 묻는 건 어쩌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매번 손을 뻗는 것처럼 늘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엄마, 할머니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가 해주는 계란말이를 참 좋아했다. 세상 그 누가하는 것보다도 참 곱고 폭신하게 얇게 파를 썰어서 설탕과 물을 한 꼬집 집어넣은 계란말이. 3층이라 오르내리기 힘든 그 집에서도 그래도 그렇게 밥을 지어먹고 한낮에 라디오나 노래를 틀어놓고 얘기를 하곤 했다. 그 동네가 너무 싫었다. 근데 아마도 할머니도 그 동네가 싫었나보다. 그 외지고 다니기 힘든 길과 3층 계단을 생각하니 그때마다 아팠을 할머니 무릎 생각이 나서 너무 눈물이 난다. 할머니는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마지막에 뭐가 먹고 싶었을까. 지난 번 입원하셔서 상태가 많이 좋아졌을 땐 고추장에 참기름 넣고 된장찌져서 시원하게 한 숟가락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언젠가는 그 단어들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누군가 나의 식사 여부를 걱정해주거나 참 맛있게 밥을 비벼먹는 걸 보면 울게되지 않을까. 슬픔에 잠기지 않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쓰는 것, 열심히 살아야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픔 마저도 인내의 시간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그 시간도 감사하는 것. 비록 내 삶이 남에게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사는 것은 은총이요, 감사이며, 기쁨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 (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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