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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마닐라

151215 : 이상무

김곰곰 2015. 12. 16. 02:12

요 며칠 까끌까끌했다. 혼자 샤워를 할 때나 좋아하는 노란 불 밑에서 요리를 할 때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잘 해야지, 고마운 사람인데 싶다가도 집이 지저분하거나 온 집에 바지며 양말이며 콜라 캔 같은 게 늘어져있거나 밥을 다 했는데도 게임을 하고 있거나 아무튼 바로 기쁘게 밥을 먹지 않고 아주 잠깐의 텀이 있으면 짜증스러웠다.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격 같은 장난을 받으면 공격으로 인식 > 나도 당할 수만은 없다 > 언성이 높아짐 > 자책으로 사이클이 반복됐다. 이러면 안되지 싶지만 솔직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 오늘 아침, 사건의 본질은 아주 단순했지만 나는 아침 부터 짜증을 냈고, 신랑은 당했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과 했지만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데면데면하게 학교까지 갔다. 이 와중에 반성하는 건 정말로 결혼하고 목소리 톤이 많이 높아진 거 같다 ㅠㅠ 짜증내지 말아야지. 누가 등 떠밀어서 여기에 온 게 아니다. 우리가 같이 생각하거 결정한 일이니까, 절대로 후회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싸우는 것 조차도 손해를 보는 기분이라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록 행복해야한다는 강박 같은 게 생기기도 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더 기분이 찌글찌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신랑이 여기와서 친해진 커플네 집에 보드게임을 하러 갔다. 오늘도 괜찮은 척 같이 갔다면 아직도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고 신랑도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신랑이 집을 비운 3시간 남짓, 나는 루시드 폴 노래도 듣고 빌 에반스 음악도 다운 받으면서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 언니랑 얘기도 했다. 비록 전화나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아니지만 신나게 ㅋㅋㅋㅋㅋ을 치면서 이야기하고 나니 뭔가 속이 후련해졌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혼자 있는 것의 좋은 점을 몇 가지 이야기하게 됐는데 하나는 혼자 있으니 덜 덥다, 혼자 있으니 벗고 있을 수 있다 (...) 정도 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보니 신랑과 함께 있으면 에어콘을 키면 되고 가끔 벗으면 되고 그것 말고 이렇게 비가 많이 올 때도 무섭지 않고 언제나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관계, 같이 있으면 더 즐거운 관계. 그런 걸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의 건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 건, 무소음과 혼자 있음이었다. 많이도 아니고 딱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나저나 신랑이 열이 나고 아픈데 자라고 놔두고 이렇게 오래 일기를 쓰고 있다. 이제 옆으로 가야지. 하지만 잊고 싶지 않아서. 내일은 더 잘 해야지. 잘 살아야지. 고마운 신랑을 잘 보살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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