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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시드니

160318 : 후다닥 일주일

김곰곰 2016. 3. 18. 22:28
금요일이다. 일을 시작한 지 꼭 한달이 되었다. 네 번의 목요일을 지나면서 이제 드디어 조금 일에, 피곤함에 적응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랑만큼 피곤해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도 그랬고 지난 주만 해도 수요일부터는 서서히 방전되서 월화와 목금의 작업 시간 차가 한 시간씩 났었는데 이제 거의 비슷하게 마무리 할 수 있어서. 하지만 어제, 오늘 이틀 연속으로 근무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오늘은 버스에서 둘이 머리를 부딪혀 가면거 자다가 집에 오자마자 십분만 누워있자 하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눈을 겨우 떠보니 깜깜 밤이 되었다. 화장을 지워야한다는 생각으로 물먹은 휴지같은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시장 본 걸 냉장고에 넣는 것도 잊고 있었다. 당근과 시금치, 연어가 비싸서 대신 직접 만들어서 신선해보이는 냉장 베이컨, 매운 고추, 아스파라거스, 스위트 콘을 사왔다. 내일은 신랑은 출근하고 나는 쉬는 날. 늦잠 자고 일어나서 고추 넣은 칼칼한 시금치 된장국에 베이컨 구워서 간단히 밥 먹어야지, 옥수수 삶는 법을 검색해보고 저녁에 신랑은 뭘해줄까. 이번 주는 신랑은 쉬고 나는 일하는 이틀 내내 집에 돌아오면 바로 밥 먹을 수 있도록 신랑이 저녁을 차려줘서 너무 행복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맛있었다. 한 번은 고추장 돼지고기 같은 걸 해줬는데 그 맛이 꼭 청진식당 같아서 그립고 맛있었고, 한 번은 국물이 많은 김치찜하고 김을 같이 준비해줘서 서대문 생각을 하면서 둘이 맛있게 먹었다. 어제는 남은 김치찜에 라면을 넣어서 계란 말이하고 먹었는데 그것도 어찌나 맛있던지! 집에서 밥을 해서 먹고 사는 일은 내게는 하나의 의식같기도 하다. 고생에 고생이 더하긴 하지만 그 고생 덕분에 그 앞뒤에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을 받는다. 아빠가 끼니를 중요하게 여기고 엄마가 매끼 따뜻한 밥을 차려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밖에서 힘들고 우울한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집밥 냄새가 나고 냄비에서는 보글보글 소리가 나고 맛있는 연기가 난다. 가방을 두고 입던 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무렇게나 앞머리를 넘기고 밥상에 앉아서 씻고 먹으라는 아빠의 정겨운 잔소리를 들으면서 우선 먹고 씻으라고 내 편을 들어주는 엄마랑 밥을 먹으면 다른 일들은 다 잊을 수 있었고, 잊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그런 기억이 내게는 중요하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거 같다. 신랑과 사는 삶에서도 신랑과 내가 함께 고생하고 돌아온 서로를 위해서 밥을 하고 그걸 나눠먹으며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우리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지 같이 이야기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함께 저녁을 먹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저녁이 있는 삶이 왜 중요한지 함께 일하고 같이 먹으면서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것이 없이 밖으로 바쁘게 다녀봐도 나중에 중요한 것을 찾으려고 할 때 그 집은 이미 비어버릴 지도 모른다. 뭘 하든 둘이 함께 하는 게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고 수확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 잘때는 자는 사람을 위해서 조용히, 커피는 신랑이, 요리는 내가, 자연스럽게 서로 분담하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앞으로 더할 건 뭐가 있는지 이런 패턴으로 둘이서 힘내면서 살아간다는 것. 생각하다보니 무거운 걸 언제나 기꺼이 들어주는 고마운 신랑. 같이 일해보니 일하고 와서까지 밥 해주는 게 고생될까 가여워서 쉬는 날은 요리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우울하다는 와이프 기분 전환 시켜주려고 매일.밤 동네 산책도 하는 착한 우리 신랑. 고마운 마음을 너무 많이 잊고, 좋은 점 보다 서운한 일만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아까 카레 잘 먹던데 오늘은 신랑 오기 전에 카레를 해놓을까?  얼른 자는 신랑 옆으로 돌아가 마저 자야지.


+ 이제는 며칠 없는 혼자 하던 퇴근길, 부쩍 가을 같아졌다. 햇빛은 여전히 더운 감이 있지만 하늘이 높아졌다. 목요일인가 오랜만에 안오던 비가 왔다. 그래서 저녁 노을이 멋졌던 하루. 함께 보는 저녁 노을이 멋진 날, 멀리서 불꽃놀이를 보는 날엔 필리핀이 생각났다. 불과 몇 달 전이지만 이렇게 지나간 것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 생각이 나는구나. 당연한 거지만 그때 거기에 있을 땐 잘 모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되는 거 같다.

+ 한 달이 되서 허리는 좀 덜 아프지만 여전히 손가락과 발가락은 아침 저녁으로 많이 부어서 굽히거나 쭉 펴는 게 힘들다.

+ 살아보고 결정하자고 조건을 달고 있긴 하지만 꽤 자주 여기서 사는 건 어떨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쉬운 방법은 하나도 없지만 보장되고 유망하지만 차선 인 방법과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고 힘들 게 너무나 분명하지만 가슴이 설레는 최선책. 둘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이미 마음은 당연히 후자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신랑은 많이 준비하고 많이 걱정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포기도 빠른 사람이라면 나는 직감이랄까, 내 안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객관적인 데어터는 적어도 일단 시작하면 포기가 더딘 사람. 그렇지만 이번에는 포기하면 안된다는 무언의 가정 아닌 가정이 있어서인지 선뜻 결정이 어렵다. 하지만 배움, 이 과정 자체에 의의를 두고 여기 남든 돌아가든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지 않게 사는 게 첫째가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