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둘 /시드니

160601 : 밤산책

김곰곰 2016. 6. 2. 13:53

비가 온 뒤 일찍 찾아온 어둠, 이렇게 채도가 없는 풍경 속을 걷기는 처음이었다. 흑백 필름을 끼고 사진을 찍는다해도 이렇게까지 완벽히 색이 없는 모습은 만나기 힘들 거 같다. 밤이긴 했지만 아직 짙은 어둠으로 뒤덮이기 전, 공기 중에 물기가 많아서 안개 속의 새벽 같기도 하고. 어두움은 보통 추움을 떠올리게 하는데 안개 때문에 따뜻한 밤이었다. 커다란 어둠의 진공 속을 걷는 기분. 풍경이 달라진다고 해서 길을 모를리는 없지만 줄곧 보던 장소가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으로 보인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먹고 산 기록들. 매일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는 일은 밥을 해먹는 일이다. 확실히 나는 외식보다는 집에서 먹는 밥을 좋아하는 것 같다. 편하고 건강하고 비싸지도 않고 제대로 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가끔 아무도 하라고 한 적 없는 이 자발적 노동이 분담되지 않아 몸이 힘들 때면 짜증스러워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집이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공간이라는 걸 몇 번이고 생각하게 된다. 점점 쉬는 날에도 멀리 나가는 것 외에는 굳이 나가지 않고 있다. 집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행동력이 없어도 되는건지, 뭐든 것엔 때가 있다는 말을 절실하게 깨닫는 중이다. 

일요일에 이어 월요일까지 일을 하고 나니 한 주가 가고, 한 주가 오는 감각도 없이 이번 주는 지나가고 있다. 굳이 월요일에 시작하고 일요일에 끝나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한 주도, 한 달도, 새 해도 이렇다할 감각 없이 지나가버리는 무감을 어찌 하면 좋을까? 쉬는 날 하루는 친구를 초대해서 낙지 볶음, 김치 찌개, 계란 파 말이, 감자 당근채 볶음, 마늘쫑 장아찌, 김치로 식사를 대접했다. 할머니가 주신 것들과 전날 밤 저녁에 오랜만에 신선해서 사온 낙지 덕분에 한끼를 잘 먹었다. 파마를 할까 하다가 친구가 머리를 똑단발로 잘라주었다. 앞머리가 없는 단발은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결혼을 전후해서 앞머리를 기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머리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리는 가볍고 안해본 일을 해서 아주 작은 희열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신랑과 함께 친구가 선물해준 화이트 와인하고 같이 바질 파스타와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구워먹었다.

그 다음 날은 신랑과 함께 지냈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었는데 비가 종일 내렸다 그쳤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가 오거나 추워지면 활동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아침으로는 커피를 진하게 내려두고 바게트 속을 파서 달걀 노른자와 바삭하게 구워논 베이컨 을 넣어서 토스트했다. 고다 치즈랑 아보카도 까지 올려서 반을 쭉 갈라 먹으니 한 쪽만으로도 꽤 배가 불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려왔다. 돌아오는 길엔 탄산수를 사고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함박스테이크에 야채를 많이 구워서 곁들여 먹었다. 새로산 버터는 야채와 궁합이 좋다. 버터 넉넉히 두르고 소금, 후추만 살짝 뿌려도 맛이 좋다. 어릴 때 엄마가 해줬던 것 처럼 스테이크 소스나 우스타 소스, 바베큐 소스에 케찹을 넣고 따뜻하게 한 번 끓여주고 달걀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함박 위에 올려주고 씨겨자를 곁들여내면 정말 맛있다. 나에겐 엄마 생각이 나는 음식, 실패할 확율이 없어서 언제나 신랑이 좋아하는 메뉴다. 그리고는 산책을 갔다가 시빌워를 보다 졸다 두 번 만에 마치고 나는 책을 읽고 신랑은 인터넷을 고치다 게임을 좀 하다 잠이 들었다.





' > 시드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0613 : 지금이 6월이라니  (0) 2016.06.13
160602 : 보면 기분 좋은 것  (0) 2016.06.02
160531 : 오월의 마지막까지  (0) 2016.06.01
20160511 : 4일간의 쉬는 날  (0) 2016.05.11
160429 : 햄버거를 만들었다!  (0) 2016.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