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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시드니

20160511 : 4일간의 쉬는 날

김곰곰 2016. 5. 11. 21:00

지난 주까지만 해도 캥거루도 보러 다녀오고 시티도 구경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데이오프를 보냈는데 이번 주는 아마도 피로가 쌓였었는지 늦잠, 동네, 늦잠, 옆동네, 늦잠, 집. 이렇게 마무리했다. 


일요일엔 흐리고 비가 왔다. 빗소리를 들으며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신랑이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무척 마음에 드는 수영복을 아주 우연히 싸게 사서 기분이 좋았다. 느즈막히 한인성당에 다녀왔다. 신랑은 요즘 요리에 부쩍 재미를 붙이고 있다. 손에 습진이 생겨서인지 집안일도 도맡아 해주니 참 고맙다. 늘 여유롭게 지내고 있지만 쉬는 날에 무언가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미사였고, 오랜만에 또 한국말로 말씀을 들으니 좋았다. 공교롭게도 부활과 승천 대축일에 미사를 가서 그런지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몇 년, 아니 삼십년이나 들어왔는데도 이제야 부활에 대해서 아주 조금 생각해보고 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것, 모든 종류의 고통과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것. 그것이 부활이라고 이야기해주셨다. 주님이 승천하시는 걸 바라보는 기쁨, 우리도 주님 떠나신 자리에 살다가 주님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기쁜 기억과 기다림의 희망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 발을 디디고 있는 여기서 기쁘게 사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월요일도 신랑과 함께 쉬었다. 살던 곳의 가을은 한해가 저물어가고 아름다운 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이었는데 이 곳의 가을은 그 반대인 것만 같다. 푸르렀던 나무들에서 저마다 다른 꽃들이 피었다. 아주 큰 나무에는 크림색 먼지 같고 레이스 같은 가벼운 꽃이 피었고 자그마한 울타리 위에 나무에는 노란 꽃이 피었다. 산책하기 좋은 바람이 늘 불고 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숨 쉬기가 답답해서 볼이 발그레해질 때 나와서는 퉁퉁 불은 손으로 차가운 우유를 마셨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온몸에 로션을 듬뿍 바르고 옷깃을 세우고 젖은 머리로 목욕탕 밖을 나오면 기분이 좋았는데 요즘 이 곳의 날씨는 늘 그렇다. 어머님이 보내주신 가을, 겨울 옷을 정리하려고 아이키아에 가서 행거와 옷걸이, 감자를 사왔다. 신랑이 조립을 하는 동안 엄마가 해준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어서 감자, 당근, 양파, 베이컨을 아주 작고 네모낳게 정성스럽게 썰었다. 달착지근하게 케찹을 넉넉히 넣어서 밥을 볶고 달걀은 두 사람이 먹을 거지만 4개로 넉넉하게, 할머니가 알려준 방법대로 물 조금 설탕 한 꼬집을 넣어서 부드럽게 스크럼블 해서 밥 위에 얹었다. 천천히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화요일은 신랑은 일을 나가고 혼자 쉬었다. 주인집 할머니가 베풀어주신 친절에 감사했다. 그러고보니 전 날이 어버이날.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신 것 같았다. 지난 주에도, 이번 주에도 지금 잘 살고 있는지로 시작해서 할아버지와 좋았던 날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신랑과 나는 지금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다.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잔다. 가끔은 한 공간에서 나는 일기를 쓰고 신랑은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각자 일하는 동안 집에 있거나 놀러 나가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젊은 날에 이렇게 붙어있는 부부도 많이 없을 거 같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만에 떡도 한 조각 먹고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했는데 바람이 무척 많이 불어서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넘어졌다. 점심으로는 말린 토마토에 바질 페스토를 넣고 후루룩 볶아서 부드러운 치즈를 한 장 올려서 파스타를 먹었다. 저녁으로는 신랑이 먹고 싶다고 한 소고기 샤브샤브를 하려고 뜨거운 물에 고추가루 두 스푼을 불리고 고기 양념을 만들어놓고 마트에 다녀왔다. 부르스타가 없어서 끓여서 가져왔더니 아주 맑은 국물의 불고기 전골 같기도 하고 국물이 많은 스키야끼 같기도 했다. 당면도 넣고 달걀 노른자에 더 연한 고기를 푹 찍어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수요일, 드디어 4일째 쉬는 날이고 이제 마지막 날. 오늘은 미뤄뒀던 옷 정리를 했다. 부엌 쪽 남는 칸에 자주 안쓰는 살림살이를 몰아 넣고 싱크대 밑까지 정리했더니 되려 옷장이 텅텅 비었다. 행거를 사온 덕에 무거운 옷, 겨울 외투를 다 정리할 수 있었다. 신발이 정리되지 않아서 고민하다 두꺼운 박스를 잘라서 신발을 한데 모아놨는데 옷장에 딱 맞는 사이즈라 기분이 좋았다. 2권의 책을 반납하고 한 권을 연장하고 새로 한 권을 빌려왔다. 자수틀을 한 번도 쓰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 시작했다. 뭘 만들고 자수를 놔야하나 그 반대인가 싶어서 우선은 무작정 바늘을 들었다. 팽팽하게 잡힌 천에 위 아래로 정직하게 움직이고 새로운 무늬를 만든다는 게 좋았다. 다음 주 쉬는 날에는 집안 전선 정리를 해야지, 5월 연말정산도 알아보고 마무리해야지. 그리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신랑과 멀리까지 다녀오고 자수도 더 많이 해야지. 


한동안 적지 못한 날들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결혼한지 6개월, 호주에 온지 3개월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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