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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은 경우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판단 기준이 그뿐이라면 한눈에 마음에 드는 그림만 질리도록 보면 그만일 것입니다.
 회화는, 그 중에서도 19세기 이전의 그림은 '보고 느끼는' 것보다 '읽는' 쪽이 먼저 입니다. 한 점의 그림에는 그 시대 특유의 상식과 문화, 오랜 역사가 얽혀 있고,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생각과 화가의 계산,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현대의 눈과 감성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택한 장치가 바로 '무서움'이었습니다. 무서움은 상상의 친구입니다. 상상에 의해 공포가 생기고, 공포에 의해 상상은 날개를 펼칩니다. 갖가지 공포는 풍요로움과 깊이, 그리고 강렬한 흡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견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은 그림일지라도 그 시대와 문화와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얽힌 여러 관계를 알아가는 사이에, 공포는 서서희 화면에서 스며 나와 그림의 모습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잘 만든 코미디나 예능 프로그램은 무섭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재미있지 않은가. 재미있는 것과는 달리 무서운 것은 우리의 가슴을 들쑤신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진저리를 치게 만든다.
 이는 성적 국면에서 받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 위태롭고 미묘한 느낌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에 대한 이야기가 곧잘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컨대 '무서운 그림'이 교양의 한 갈래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교양은 보탬이 되는 것이다. 안전한 것이다.
사실 이는 무서운 이야기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이야기는 무서운 존재를 끌어들여 길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찌 되었든 이야기를 하는 이와 듣는 이는 온전히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무서움은 비합리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확률이 매우 낮은 사고, 감염, 재양 따위를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지만, 한편으로 근거 없는 낙관과 무지를 동원하여 뭔가에 대한 무서움을 외면하려, 막아내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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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이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