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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써야해

김곰곰 2014. 7. 5. 06:29

사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책들을 보는데 그 접힌 귀퉁이가 왜 이렇게 슬프고 짠한지 모르겠다. 그냥 울고 싶은건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내 자신 속의 확신'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내가 그리는 꿈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그려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전을 가지고, 밤낮으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회사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장소이자 인생의 한가운데서 '열심히 사는 시간'을 보내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 거기서 새롭게 '에스프레소' 라는 숙제가 생겨 모두 번갈아가며 연습하고 있다. 언젠가 카페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바로 그 연습인 셈.




+ 나는 그렇게 잃어버리는 데 천재였다. 중요한 점은, 잃어버리더라도 무엇을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

 

 

 

+ 어쨌든 여기에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이었다.

 


+ 섭섭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더 다가가면 갈수록 내가 예상하는 어떤 것이 언젠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렸다. 






내 인생을 돌이켜볼 때, '한결같이', '오로지' 또는 '필사적인' 삶의 자세는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심각하게 인생을 고민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내가 사양한다.근대문학 속에 나타나는 '고독=성실'이라는 관념이나 '문학=독창성'이라는 사고방식에도 익숙지가 않다.


 나는 오로지 산 자체만을 위해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일단 한번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은 그분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하느님에게 의탁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여유롭고 즐겁게 구도생활을 즐기는 종교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하느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다면 분명히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밝고 즐겁게 사는 것을 원하실 것이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갖고 우리가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다. 이 신뢰는 삶의 기쁨이나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만, 와닿지 않는다.

불가해한 부유감이다.

이렇게 이상한 정신상태에서도 <나>를 끊임없이 영위하며,

지칠 줄 모르고 숨쉬고 있는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너, 요즘 들어서 만날 때마다 알아보기 어렵다."
 내가 말했다.
 "그런 시기야."
 그녀가 스트로로 주스를 빨아들이면서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했다.
 "어떤 시기인데?"
 내가 질문을 던졌다.
 "때늦은 사춘기라고 해야 되나.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 자칫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따돌림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거 아냐?"
 "그럼 나 자신을 잃어버린 나는 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야?"
 "2,3일 정도라면 내 아파트에 머물러도 좋아. 너 자신을 잃은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스미레가 웃었다.
 "농담은 그만둬."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모르지. 어쨌든 너는 담배를 끊었고, 청결한 옷을 입게 되었고, 좌우의 짝이 맞는 구두도 신게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구사하게 되었어. 와인을 선택하는 방법도 배웠고, 컴퓨터도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어. 그러니까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그리고 소설은 여전히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있어."
 "모든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 거야."
 스미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이런 것도 일종의 변절이라고 생각해?"
 "변절?"
 나는 일순, 그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변절, 신념이나 주장을 바꾸는 것."
 "즉, 취직해서 세련된 옷을 입고 소설 쓰기를 포기한 것?"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썼던 거야. 쓰고 싶지 않으면 쓸 필요가 없어. 네가 소설 쓰기를 그만둔다고 해서 도시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냐.(이 부분이 쓸쓸한 거지만) 배가 침몰되는 것도 아니고, 밀물과 썰물에 변화가 발생하는 것도 아냐. 혁명이 5년 늦어지는 것도 아니라구. 그런 건 아무도 변절이라고 부르지 않아."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최근 들어 단순히, '변절'이라는 단어를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 이유는 유행에 뒤떨어져 쇠퇴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딘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코뮌으로 간다면 사람들은 그걸 변절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사정은 나도 잘 몰라. 내가 알 수 있는 건 만약 네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면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거야."

(중략)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건 아냐."
 스미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쓰려고 해도 아무것도 쓸 수 없어. 책상 앞에 앉아도 아이디어나 언어, 감흥이나 경치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단 한 개도. 얼마 전까지는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게 묻는 거야?"




이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같은 세계의 달을 보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의 선으로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끌어 모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두 손바닥을 바라본다. 나는 거기에서 피의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피의 흔적은 없다. 피냄새도 없고 딱딱한 긴장도 없다. 그것은 이미 어딘가로 깊이 스며들어 가버린 것이다.




끔찍했다. 어떤 형태로든 삶의 모양새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변화 없는 소소한 습관들은 언젠가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이다.

 

 

 



 

 

젊은이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늘 그걸 물으며 살아야 해.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인생이 의미를 갖게 되지


하지만 그건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덴고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우선은 내 발로 찾아보자. 나 스스로 뭘 할 수 있을지, 조금 더 지혜를 짜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일이 그립게 떠올랐다. 그런 관계가 언제까지고 이어지리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갑작스레 끝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 나는 사실 부끄럽다. 고뇌고 뭐고 없다. 왜 안 쓰나? 사실은 몸의 상태가 조금 안 좋아서,라고 궁지에 몰려서 눈을 내리깔고 애처롭게 고백하곤 하지만, 담배를 하루에 오십 개비 이상 태우고, 술은 마셨다 하면 보통 한 되 이상 쉽게 마시며, 그리고 나서 오차즈케를 세 공기나 쑤셔 넣는 그런 병자가 어디 있어. 언제까지고 이래서는 나는 도저히 가망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나로서도 괴롭지만, 더는 자신을 응석받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이니 고매라느니 순결이니 순수이니, 그런 말은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쓰라고. 만담이든, 콩트든 상관없다. 쓰지 않는 것은 예외 없이 나태해서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맹신이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일도 할 수 없고, 자기 이하의 일도 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인간 실격,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각한 얼굴로 책상머리에 앉지만, 막상 아무것도 안 한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 별반 심오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으름뱅이의 공상만큼 우스꽝스럽고 터무니 없는 것은 없다.

 

 

 +  "항상 너를 생각해보면 왠지 꼭 그럴 것만 같았어. 넌 평범한 애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쯤 뭘 해도 안정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백수라니, 내 생각과 딱 들어 맞았잖아?"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내 앞에서 길게 하품을 한 고모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번에 세간의 눈이 집중된 게 아니라, 힐끔힐끔 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점점 제대로 보게 된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면 흔들리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눈 앞에 있는 것을 묵묵히 하고 있으면 점점 길이 이렇게 넓어져가고 있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엄청 먼 미래를 상상해본다기 보다는 눈 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하면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거란 확신이 최근 2,3년 동안 생겼다고 할까.

 


물론 그는 오래전부터 수첩에다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적은 뒤, 밤이면 그 수첩에 적힌 내용을 온전한 문장으로 고쳐 쓰는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공책에 적어나가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은 많이 달랐다. 소설 안의 모든 문장은 서로의 인과관계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개개의 문장은 모든 문장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그 어떤 문장도 외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짐작하겠지만, 그가 쓴 소설에는 그와 죽은 여자친구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문장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처음에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문장을 써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안간힘을 다 썼다.

 



최근에 옷에 대한 집착이 없어졌다고 밝히긴 했지만, 옷 입기를 즐거워하시잖아요. (블라)

 

있는 옷으로 돌려입고, 막아입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무조건 편안하게. 과거에 옷에다 저를 맞췄다면 이제 옷이 나한테 맞춰야 해요. 그리고 저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옷 잘 입고 겉모습 화려한 배우를 보면 "쟤는 영혼이 맑지 않고 허영기가 있어. 저런 데 신경을 쓰니 연기적 에너지가 덜할 거야" 라는 편견이 있잖아요. 반대로 허름하게 하고 다니면 막연히 연기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든가. 사실 그렇진 않거든요.

 

 


아마 영화를 볼 때도 재미있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억에는 남아 있다. 이런 영화는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의 문제는 사람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볼 때는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영화도 많다. 볼 때는 괜찮았지만 나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영화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이상한 야구 영화, 그중 어느 쪽이 내게 더 귀중한 영화일까?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영화가 과연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내 청춘의 유일한, 눈부신 긴장으로 가득 찬 마지막 기회와 어쩔 수 없이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제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친구가 다니는 학교에 내가 다니지 않으면 부끄럽다든지, 친구가 대기업에 들어갔으니까 나도 들어가야한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말입니다. 21세기에는 획일적인 사고로는 살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어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무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일에 자신감을 갖는 편이 훨씬 중요하고 행복하죠.

 





나이를 먹는 것 자체는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떠한 시기에 달성되어야 할 것이 달성되지 못한 채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은 조금도 쓰고 있지 않은, 열심히 읽고 있지도 못한, 그렇다고 일에 만족하고 있지도 않은 내가 별로 마음에 안들고 그래서 또 안타까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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