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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58번째 아빠의 생일

김곰곰 2014. 9. 12. 03:18

서두르지 않고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길을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걷고 있습니다. 짧은 그림자로 봐서 때는 한낮입니다. 앞서 가는 여인을 뒤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눈에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마음이 보입니다. 그림의 왼쪽은 푸른색으로 남았고 키 작은 들꽃이 피어 있는 길은 오른쪽 끝에서 잘려 버렸지만 사내가 걷는 길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나이 들면 서두르지 않고 늘 저렇게 앞에 가는 사람을 지키듯이 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때는 나이 먹는 것이 자랑스러워 생일이 되면 여기저기 소문을 냈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인지 이제는 생일을 맞아도 덤덤합니다. 더 이상 뛰지 않기로 하면서부터 저의 생일이 점점 간소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생일상을 받고 그림 속 사내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내년 생일에는 이 사람을 얼마나 닮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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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하루 그림, 선동기. 아트북스.



+ 내 생일은 언제나 자축이었어, 라고 말하는 아빠의 말에 문득 지난 모든 시간만큼 미안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아빠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그보다 일찍 일어난 아빠가 어제 엄마와 내가 머리 한 값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아침 일찍 보내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빠는 엄마와 내가 같이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는 그 일상이 참 좋았나보다.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그 흔한 케이크도 안먹고 아침에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는 게 생일의 거의 전부다. 아빠만 안챙기는 게 아니라 엄마도, 철이도, 나도 그렇다. 그렇다고해서 그게 몹시 서운하거나 눈물이 나는 일은 아닌게 그냥 계속 그래왔다. 물론 어렸을 땐 기억은 안나지만 엄마 아빠가 토끼 인형도 사주고 수안보 온천에도 데려가주었던 것 같다. 그저 아스라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 구체적인 형태를 띄고 있지는 않다. 그런 올해 내 생일엔 아빠가 큰 돈을 주었는데 물건을 고르지 못한 게 아빠같았다. 의식이 있는 동안에 이렇게 구체적인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라 그 자체가 고맙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했다. 왜냐하면 내 생일은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에. 월급이 제때 안나오고 4월, 5월에 두 번 출장을 겸해서 며칠씩 해외에 다녀왔더니 돈이 없었다. 카드로는 얼마든지 뭔가 사드릴 수 있었지만 나 역시 부모님의 물건을 사는 일은 쉽지 않아서 번번이 돈으로 드린다. 그 놈의 실용성이 뭐라고. 선물 같은 거 사지 않고 생활비에 쓸 걸 알면서도 돈을 벌고 나서는 때마다 늘 돈으로 드렸기 때문에. 아, 생각해보니 선물은 동생에게만이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그런 존재구나. 그런데도 그 돈을 다시 돌려드리지 못하고 넙죽 받은 건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딱 한 학기 첫 수업 값이어서. 다음에 더 큰 돈과 감사로 돌려드리겠다고 혼자만 생각하면서 수업을 등록했다. 그 돈이 참 반갑기도 하고 일을 하다보면 느끼지만 세상에 부모가 아니고 그 누가 내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뜻 돈을 주겠나 싶은 생각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김영오씨를 보면서 아빠의 자격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돈을 못벌어다주고 고생 시켰으니까 그렇게 죽은 딸이 더 안타깝겠지, 하고 말하는 나를 보며 우리 아빠에게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나 하고. 돈이 전부는 아닌데 또 중요하니까 나도 알게 모르게 참 아빠를 원망했던 것 같다. 나와 다른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빠가 철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나 내가 아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거나 다르지 않을텐데 늘 아빠가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삼십 살이 되고 일주일 후에 아빠가 오십여덟 살이 되었다. 앞으로 두 해. 효심에 불타서 직장에 이 한몸 바쳐 여행 보내드리고 평생 용돈 드리겠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정말로, 진실되게 내가 할 수 있는만큼. 내 팔을 쭉 뻗어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 내 다리가 버틸 수 있는만큼 부모님과 동생에게는 잘해주고 싶다. 하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려면 백만원을 벌든 오백만원을 벌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훼손되지 않고 맑아져야 할텐데. 내가 버티는 동안 모두 모두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맑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일이 허락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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