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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첫마음이라는 책을 읽다가 천주교 주소록에 들어가 평소에는 보지 않았던 선종하신 신부님들 이름을 보다가 너무나 빠른 시간에 돌아가신 차기병 신부님의 이름을 보게되었다. 혹시나 어떤 사연이 있을까 검색했다가 그 분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지 일년만에, 그것도 서른에. 내 나이가 서른살을 이제 막 지나와서 그런지 너무나 안타깝고 또 사무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선종한 사제 백여명의 이름을 뒤에서 부터 보았다. 주교, 몬시뇰, 오래 전에 수품 받으신 분들이 아닌 순서로. 그렇게 보다보니 산사태로 대학생들과 봉사하다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미 오랜 시간 아프시다가 너무나 아파 보여서 병원으로 옮긴지 12시간만에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과로로 쓰러지셨는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분도 계셨다. 아무런 사연이 없는 사제들도 많았다. 사람의 인생이란 저마다 소중한 시간이 있었을텐데, 물론 그런 기억이 인터넷에 있어야하는 건 아니지만. 보다보니 유난히 마산교구 신부님들이 많은 것 같아 보니 정말로 돌아가신 100여분 중에 20분이 넘게 마산교구였다. 마산은 어떤 도시인지, 순명이란 어떤 것인지 삶을 지루해할 시간이라는 게 있는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산교구의 차기병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나이 서른에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사제가 된 지 일 년 만이었습니다. 1988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성직자 묘지에 가면 그의 무덤에는 늘 꽃이 놓여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꽃을 놓고 가는 분이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안고 사는 분일 겁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론이고, 가족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서른 살의 죽음은 사제가 아니더라도 가슴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의 무덤 앞에 서면 ‘우리 대신 죽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날은 ‘주님 봉헌 축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만난 시메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꽂는 예언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께서는 조용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바치는 행위입니다. ‘바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쓰라린 것’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만큼은 내가 바칠 ‘나의 봉헌’을 돌아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