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나 /일기

11월 15일 : 목요일 수능

김곰곰 2018. 11. 16. 00:08

수능 시험이 끝난 밤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수능은 그렇게까지 큰 행사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수능 날은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 날이 수능이라고 학교에서 일찍 집에 보내줬는데 집에 돌아와 빌라 앞 정자 같은 데 앉아서 초코렛을 먹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없는 수험생이었다니..

 그 날은 기모가 얇게 들어간 곤색 DKNY 츄리닝을 입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 애들을 보면서 '아, 교복 정말 불편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게다가 맨 뒷 자리여서 꼭 재수생 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공부 많이한 다음 날 머리를 안감는다던지, 그때 입었던 옷을 입어야한다던지 하는 세세한 징크스는 없었지만 고3 시절 매일 깔고 앉았던 방석을 품에 안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과 포도 쥬스가 담긴 컵 모양의 텀블러를 들고 갔다. 마침 시험을 친 학교 앞에 담임 선생님이 와계셨고 머리가 덜 말라서 풀고 있던 걸 보고 너 파마했었냐며 내일 보자고 눈을 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울만큼 무던한 아이였던건지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시험에도 별 영향은 없었다. 언어, 수학, 사탐, 과탐, 외국어에 제2외국어까지 참 오래 시험을 봤다. 제2외국어 시간 쯤 긴장이 풀리고 목이 뻐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다 창 밖으로 겨울 해가 지는 짧은 순간을 봤는데, 그 순간이 무척 긴 것 같았다. 그 노곤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고 다시 방석을 안고 가방을 메고 교문 앞에서 신영이를 만나서 역까지 걸었다. 꽤 추운 날씨였을텐데 추웠다는 기억도 없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서 방석을 깔고 앉아서 아마 예슬이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통화를 하고 언니랑 밥을 먹는다고해서 우리는 둘이 떡볶이를 먹었다. 무슨 정신인지 모른 채 먹고 다시 집까지 걸었다. 걷는 동안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걷는 동안 해가 졌고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서 뉴스를 좀 보고 잠들었을까. 컴퓨터를 했나. 아마도 가채점을 했던 거 같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어수선한 반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 다음 날인가 그 다음 주인가 이사를 했다. 삼층에서 이층으로 갔던가. 책상 옆에 침대, 침대 앞에 책장으로 가득 찬 아주 작은 방이 있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해 겨울엔 가끔씩 자주 동생하고 집에 둘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종종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예슬이가 낮에 집으로 찾아왔었다. 하릴없이 동네를 걸어다니다가 초등학교 때 동창을 만났던 거 같기도 하고. 그 다음은 기억이 잘 없다. 며칠 정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가벼운 기분으로 농담을 주고 받고 학교 투어 같은 걸 갔던 거 같기도 하다. 수능이 끝나고 나는 논술도 안하고 예체능이 아니라 그림 그릴 일도 없고, 재수 생각도 없이 모의고사 보다 떨어진 성적대로 아주 안전한 학교들만 지망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운전면허에 도전했지만 학원이 문을 닫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것 외엔 졸업 때까지 기억이 흐릿하다. 

 주말 마다 성당에 갔고 엄마가 예쁜 빨간 코트와 갈색 가죽 자켓을 사주어서 그걸 즐겨입었다. 졸업 전엔 눈이 많이 왔던 것 같다. 졸업식 날은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 엄마와 할머니와 집에 돌아와서 짜장면을 먹었던가, 그날도 창 밖이 하얀 깨끗한 겨울 날이었다. 

 수능을 보고 그럭저럭 대학에 입학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 같으면 한우물을 판 학생 전형 같은 걸로 논술을 쓰고 어문학과 같은 걸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되려 고민같은 거 없이 할 줄 아는 게 이것 뿐이라..하는 느낌으로 대학원에 가고 어딘가 멀리 유학을 갔을지도 모르겠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사회 과목을 잘하는 특이점으로 인해 애매한 포지션에 놓인 채로 지금까지 갈팡질팡 하고 있는 거 같다. 아무튼, 수능은 내 인생의 특이점이 아니었다. 내 인생이 소모 되지 않는 일을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 모르는데 찾을 수 있긴 한걸지. 


    

'하나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안녕  (1) 2018.12.31
12월 20일 : 스물 일곱  (0) 2017.12.20
11월 24일 : 누구든  (0) 2017.11.25
먹먹한 마음  (0) 2017.03.24
믿는다는 건 무조건 적인 것  (0) 201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