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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고민은 나의 힘

김곰곰 2012. 1. 23. 01:55

빅터 E.프랭클은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인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고 말했습니다.

이제 고민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가치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재앙'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민하는 인간'은 그저 운이 나쁜 불행한 인간에 불과한 것일까요?


 덧붙여서 우리에게 큰 중압감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중략) 그렇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종교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습니다. 이렇듯 현대인은 상반된 욕구에 정신이 조각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의 대부분은 '근대'라는 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내가 '근대'에서 이어지는 현대를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 모두가 근심 걱정없이 즐겁게 소비하며 살아가는 데 어째서 나는 이 쪽에도 저 쪽에도 완전히 융화되지 못한체 고민하며 늘 자신을 가질 수 없었을까. 그런데 무수히 읽다보니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었던 시대, 근대. 이것이었던건가.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소세키와 베버가 닮았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처음엔 두 사람의 조합이 좀 엉뚱한 것이어서 '이상한 말을 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로 통하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막스 베버는 서양 근대 문명의 근본원리를 '합리화'로 보고,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가 해체되고 개인이 등장해서 가치관과 지식의 모습이 분화해 가는 과정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가 묘사한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구원받기 힘든 고립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나쓰메 소세키보다 3년 정도 이른 1864년에 태어났고, 나쓰메 소세키보다 4년을 더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일본과 독일에서 태어난 이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 결국은 자신이 살아있는 세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세계에 대해서 밖에 인간은 생각하고 규명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일본과 독일의 두 사람을 알았을 때 가슴이 뛰었다는 저자처럼, 나 역시 가슴이 뛴다. 내가 생각한 것을 미리 감지하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다. 역시,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대에 맞선 두 사람의 태도 또한 비슷합니다. 그것은 '시대를 받아들이자'는 각오와 비슷한 것입니다. 시대는 거친 격류처럼 흘러갑니다.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흐름에 올라타지만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겠어.' 두 사람의 저작을 읽어 보면 이런 생각이 전해져 옵니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비참한 실패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을 소모품처럼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있다'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국가가 있다'는 방향으로 전환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십 년 동안 노력해 왔는데 현재의 상황은 수상쩍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나라 뿐 아니라 사람도 말이지, 결국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한다. 옳바른 바탕을 가지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배우고 성장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치명적인 약점 또는 악한 부분을 가지고 있더라고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어느 땐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그걸로 인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


 참고로 위에 열거한 물음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살았던 시대에는 '지식인의 특권'과 같은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보와 지식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고민 또한 그때보다 더 보편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묻는 '자아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자아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는 매우 성가신 문제로 나 또한 오래 고민했던 문제였고, 여전히 '헤결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자아가 비대해지면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현재 자아의 병리적인 비대화는 무척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우울증'이나 '히키코모리'같은 마음의 병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청춘 시절의 모습을 살펴보면 마초적인 남자였다기보다는 해답이 없는 물음을 던지고 고민하는 '창백한 고뇌'와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청춘을 얼마간 허무와 함께 보내고, 그래도 의미를 묻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좀 추상적이지만 '허공에 걸려 있는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존적 공허함'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도 그렇구나'라고 느끼며 힘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춘이란 밝은 것만이 아니고 한 커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

 자아의 어둠을 찾다 보면 이유도 모르는 이매망량(온갖 유령과 도깨비)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고민 없이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핏 원숙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원숙한 것이 아니라 바닥이 얕은 원숙함, 즉 원숙한 기운만 풍기는 것이지요.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유쾌해집니다. 인생에 그런 시간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책을 읽어도 좋고,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는 것도 좋고, 이런 시간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그 후]라는 제목과는 달리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경제적 곤란에 시달리는 현실적인 생활자가 되었겠지요. 또한 간단하게 '신성'한 일자리를 찾지도 못했을 것이고, 작아도 좋으니 일자리만 찾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이상이나 환상을 그리며 원하고, 환상은 무한히 아름답게 펼쳐지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고 왜소한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타협의 산물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나는 버림을 받았어', '아무도 나를 고용해 주지 않아'라는 생각이 아닐까요? 아무도 고용해 주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느 순간에 선을 긋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상대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애정의 온도가 떨어졌을 때 쓸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바뀐 것일 뿐이지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에서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뭔가 다른 차원의 장소에 사랑의 성지를 만들고 그곳에만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찬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랑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자살'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데 "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죽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잔혹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내 주변에 죽어도 좋을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당연히 죽지 말라고 얘기하고 잡을 것이다. 그의 아픔이나 슬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해서 피상적인 위로밖에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삶의 마감에 대한 생각은 때때로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살고 싶어서, 날 알아주면 좋겠어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유를 얻은 대가로 관습이라는 제동장치 대신에 살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될 무언가를 각각 손에 넣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만이 죽음에 대한 억제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재능이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해야 했습니다. 어릴 때에는 '사회에서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부조리를 알아차린 이후 천천히 걸으면서 조금씩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 인정의 관계를 만들어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때로는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만족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타자를 인정하면 기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납득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험이 쌓여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요.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나를 굽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고 나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얻은 힘으로 나는 내가 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비로소 내가 된다는 의미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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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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