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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이 책을 읽는지/ 장정일의 독서일기


어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왜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한 세 개 이상의 이유를 먼저 떠올려보기를 권합니다.

(박노자-고미숙)

 

 


- 20대의 독립을 위하여/ 88만원 세대


 저자도 말하듯이 "청소년들이 20대에 독립을 하거나 더 일찍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좋아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20대 독립'이 불가능한 사회는 그만큼 "경제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꽉 막혀 있고,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장치들을 갖추지 못한" 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젊은 세대의 독립을 지체시키는 비효율적인 사회는 급격한 출산율 저하와 퇴행적 성인의 등장이라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저자들은 묻는다. "10대 후반에 독립하고 동거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인이 된 선진국의 10대와 지체 현상 속에서 종속된 존재로서 어둡게 20대 초반을 맞는 우리나라의 10대들이 경쟁을 하면 누가 이길 것인가?"

 "만약 20대 1만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는 선언" 한다면 "100명의 20대가 자신의 카페를 가지고 경제적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의미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반프렌차이징 운동은 "스위스와 스웨덴 같이 프렌차이징을 권장하지 않는 나라가 4만 달러 경제로 넘어갔던 사실과, 프렌차이징을 늘리면서 사회 양극화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전체 사회에 알리는 효과가 있다.

 

 

 

- 삼성 말고 아무거나/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이 말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례로 삼성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일자리의 숫자보다, 삼성의 문어발식 경영과 하청 관행이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태가 더욱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다. '국민 가수'니 '국민 여동생'이니 하며, 온통 '국민'에 열광하는 우리나라이지만, 삼성이 '국민 기업'으로 사랑 받기에는 모자람이 많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는 풍설을 냉철히 분석해 보고, 그 협박을 뿌리칠 때다. 

 

 


- 인간적인 경제학 /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일례로 대개의 경제학 이론이나 현실의 사례는 고용주의 이익이 고용인의 이익과 상반되거나 또는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이해관계가 상반된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또는 언제나 대립하지는 않는" 이타적이로 자기희생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집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는데 어머니와 아이들이 모두 굶주려 있다면, 그들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어머니가 그 빵을 먹으면 아이들은 빵을 먹을 수 없고, 아이들이 빵을 먹으면 어머니는 배를 곯은 채 일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 사이에 '적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빵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힘이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해서 먹어버리는 결과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적개심을 품고 서로 바라보며, 이익을 얻기 위해 폭력이나 교활한 책략을 쓴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부자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부자에 대한 이런 양가감정과, 부자에 대한 과도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아예 부자를 악인과 동일시하는 감정은 한국인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흔히 얘기되곤 하지만, 러스킨의 이 책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러스킨이 이 이야기에서 제목을 발췌한 것은, 노동자는 노동할 권리가 있으며, 노동자는 공평한 보수로 생존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작년부터 한 기독교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해고 사태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게 내 뜻'이라는 포도밭 주인의 지혜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뒤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보장해 주는 포도밭 주인의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고서도 차별을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는 불합리한 처사다. 그리고 단지 뒤늦게 태어난 죄(?)로 높은 경쟁과 열악한 노동조건, 형편없는 보수를 받게 될 '88만원 세대'에게도 포도밭 주인과 같은 지혜가 베풀어져야 한다.

 

 

 

- 미국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제국의 미래


 인류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페르시아에서부터 로마, 당,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의 예로부터 제국이 흥하게 된 비결과 망하게 된 원인을 찾고자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다.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반대로 인종적·종교적·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로 시작되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는 고스란히 제국의 쇠퇴로 이어졌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종교의 자유와 다민족을 포용하는 이민자 정책을 택했기에 오늘날 같은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반면, '천년 제국'을 꿈꾸었던 나치 독일은 인종적 증오로 말미암아 자국은 물론이고 인류사에 큰 재앙을 부르고 패망했다. 그렇다면 2001년 9월 11일 이후, 노골적으로 제국을 자임하고 나선 미국은 성공할 수 있을까? (중략) 사전에서 찾았듯이, 제국이란 먼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여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다른 국가를 정복하는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민주적인 검열을 통과해야 한다. (블라)네오콘이나 광신적인 복음주의자를 제외한 대다수 미국민들은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이 책 「제국의 미래」는 '단일 민족'의 환상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풍요롭고 요긴한 영감을 준다.


 

 

- 책이란 읽지 않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것/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읽기)

 

 

-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다 /천천히 읽기를 권함


그러니 이상적인 독서의 속도란 일반화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은 어떤 속도로 읽는 게 좋으냐?'란 질문은 좀 우문이 아닐까? 그런데도 야마무라 오사무가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쓴 까닭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타치바나 타카시의 속독론과 다독론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어서다. (공감한다)
 
 "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다"(라)고 저자가 쓴 바대로, 어떤 책을 어떤 속도로 또 얼마나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의 삶과 밀접히 연동된다.  실제로 사회인이 되기 이전의 책과 사회인이 되고 나서의 책이 완연히 다른 것은, 나의 삶이 어떤 책을 선택하고 기피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속독과 다독으로 무장한 다치바나 타카시는 취재와 저술이 직업이 된 그 방면의 전문가가 어쩔 수 없이 택한 독서술일 뿐, 일상인 마저 그를 흉내내어 '불행한 독자'가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애서광인가? -자가진단법 수록 / 애서광 이야기


 앞서 츠바이크의 단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애서광의 심리는 반드시 자신의 수집물을 인정받고자 하는 노출욕으로 드러난다고 썼다.
 

 


-성차별의 이중 잣대 /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외설, 예술, 미성년 약취, 현실과 문학의 잣대, '악의 평범성' 독일 작가-

 

 


-양심이 마비된 도덕적 문맹 / 유니스의 비밀

 

(블라)직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모든 텍스트를 대상으로, 세간의 이목을 끈 형사 사건이 어떤 식으로 문학이나 영화로 변형되는가를 연구한다.

 이 소설은 "유니스 파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고 실제로 유니스는 가정부로 고용한 가족이 자신의 문맹을 간파하자, 굴욕을 느끼고 그들을 몰살시켰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문맹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한 가족을 살해할 만큼? 「유니스의 비밀」은 당면한 우리의 의문에 자상하게 답해 주며, 나아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리더」에 심도 있는 해석을 더해준다.
 유니스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자신의 문맹이 '부끄러워' 한 가족을 살해한 게 아니다. (중략), 작가에 따르면 문맹은 그 당사자의 '상상력과 감정'마저 문맹의 상태로 만든다: "문맹은 그녀의 연민은 고갈시키고 상상력을 퇴보시켰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린다는 것은 이제 그녀로선 불가능한 일이다."(74쪽) 문맹은 인간에게 필요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빼앗고 인간관계와 소통을 기피하게 만든다.


 아무리 그림과 영상들의 '이미지 문화'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활자는 나와 타인, 나와 사회,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광범위한 길이고 창이다. 그래서 작가는 "글은 우리 혈관 속에서 피처럼 흐른다. 그것은 모든 말 속에 파고든다. 지시와 묵종의 관계에서와 달리, 대화에서 인쇄된 글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읽을거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95쪽)고 말한다. 문맹은 대화로 통하는 길과 창을 막는다. 그것이 막히면 나와 사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심이 마비된 문맹이 되고 만다.
 
 

 

-왕따들이여 부조리에 대면하라 /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앵무새 죽이기

 

 어린 소녀의 의혹에 쌓인 죽음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작품소개와 미리니름은 분리하기 어려운 샴쌍둥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 소설 역시 하나의 사건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도 하나의 독법만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 일례로 이 작품은 나와 타자를 구별짓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제공한다.


 , 각자가 자신의 문제를 이겨내고 성장하는 성장담이다. 작가는 찰리와 제프리가 벌인 슈퍼맨과 배트맨에 대한 수다스러운 논쟁을 통해, '왕따'가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한 인상 깊은 담론을 펼친다. 작가는 마치 타란티노의 영화 주인공들을 흉내내는 듯한 입담을 통해, 애초부터 천하무적이었던 슈퍼맨은 정의를 행사하기 위해 별다른 용기를 낼 필요가 없지만, 연약한 보통 인간에 불과한 배트맨에겐 자신의 공포를 이길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근친상간은 부적절한 성적 관계만을 지칭하는 악덕이 아니라 사회적 은유로도 전용이 가능한 개념이다. 나치즘이나 시오니즘은 물론이고 이 소설의 맥락을 부분적으로 설명 해 주는 백호주의 역시, 낯선 것과 어울려 살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을 한번도 타자화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범하게 되는 사회적 근친상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다가 아예 작가는 찰리로 하여금 "나는 이 상황을 아티커스 펀치 식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한다"고 자주 말하게 하는 것으로, 일종의 오마주를 구축한다.
* 상호텍스트성 읽기/ 시오니즘[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민주주의는 선거가 아닌 추첨? / 선거는 민주적인가

 

왜 그랬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쳐 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는 것이다. 재산 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저조한 투표율은 흔히 '정치 무관심'으로 풀이되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본서가 현대의 선거를 아예 한 줌의 엘리트들을 위한 "과두제적인 절차"며 평범한 시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방해"한다고 단정 지은 것처럼, 투표장에 가지 않은 많은 유권자들은 당선권에 든 중요한 입후보자들의 전력이 상종 못할 범죄자와 거의 같은 유형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세와 재력을 지닌 파렴치범들이 승리할 것이며, 그 게임에서 뽑힌 당선자가 민의와 겉돌 것이란 것을 너무 뻔히 안다. 그들은 '정치 무관심'자가 아닌 '선거 무관심'자들이며, '간접행동'대신 '직접행동'을 선택한다.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 / 신화는 없다

 

하나는 어떤 책을 읽었고, 둘은 학창 시절의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의 유무였다. 책과 스승은 한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뼈대이니, (중략)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책을 읽고서, 이 자서전의 주인공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도통 알아 낼 수 없다. 대학 시절 "나는 틈이 나면 어디서나 책을 읽었고 사색에 잠겼다"(63쪽)고 하고, 1964년 6·3시위 주동자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다시 "전공서적 이외의 책들도 읽었고, 생각에 깊이 잠겼"(76쪽)으며, 또 타이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매일 새벽마다 "보고 싶은 책을"(105쪽) 읽었다는 데, 감질나게도 도서명은 적어 놓지 않았다.

 

 

 

-배신에도 수준이 있다 / 신뢰와 배신의 심리학

 

"우리가 배신을 당하든, 배신자가 되든, 배신의 경험은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민족주의의 역설 / 오 하느님


* 시부적이. 시부적거리다 [동사]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거볍게 행동하다 시부적대다. 시부적이

 

 


-한 번도 포착되지 않은 풍경 /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

 

그래서 외국인들은 한국의 조폭 영화를 보면서 '조폭'을 북한에 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는데, 마크슈미트의 <친구>에 대한 분석은, 내가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그럴듯하게 들린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 영화 속의 '조폭 사랑'을 꼭 들추지 않더라도, 한국인에겐 조폭에 대한 양가감정이 없지 않으며, 한국인이 조폭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은 또한 한국인의 '북한'에 대한 양가감정과 퍽 유사하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조폭의 무법을 미워하면서 그들의 힘을 동경하듯이, 한국인들은 북한의 핵을 두려워하면서도 미국과 '맞짱'뜨는 북한을 경외의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사건 아닌 사건 /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공포와 추방이라는 실존의 형벌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실감하거나 사태로 부터 도피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고작 폭력과 섹스가 꼽히지만, 작중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카파는 줄곧 언어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멈추지 않습니다.

 

 

 

-패배자들의 목소리 / 핫라인

 

"행동하는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는 그러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조국 칠레가 안고 있는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 치유하고자 했다. 그에게 작가란 존재는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대변인이다. 그래서 세풀베다의 작품에는 대체로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강하게 깔려 있고, 소외된 자들과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에게 문학이란 실제로 쓸 수 있고 쓸 줄 아는것들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민주적인 공간이며, 얘기할 수 있는 능력만이 중요시된다. 공식적인 역사는 승리를 거둔 자들이 써왔고, 다른 역사는, 즉 진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진정한 역사는 늘 작가들이 써왔으며, 세풀베다는 그러한 작가의 사회적 기능을 그냥 간과하지 않았다."

 

 


-신 노인의 무기력과 분노 / 폭주노인

 

원래 폭력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열거된 범죄는 '문학적 광증'처럼 보인다. 그만큼 오랫동안 우리는 노인들은 성숙하고 지혜로우며 관용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믿어왔고, 활자나 영화, 드라마에서 재생산되는 노인의 이미지 역시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의 영화적인 아이디어.)

 

 


-또라이 공화국 / 또라이 제로 조직

 

비열한 인간이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올 수 없을 뿐더러, 이미지 손상으로 "투자자들의 믿음과 신뢰"마저 흔들리게 된다.
 경쟁이 미덕이 되거나 미래가 불투명한 가운데 간혹 '능력 있는 또라이'가 용인되기도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또라이'때문에 치르는 '또라이 세금'또한 만만찮다. 인간에 대한 양식과 품위가 지켜지는 일터는 꼭 환상처럼 여겨지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공포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기업은 탁월한 인재를 끌어당기며, 이직으로 인한 손실을 낮추고, 보다 더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파괴적인 내부 경쟁을 줄임으로써 외부 경쟁에서 승리를 맛본다.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기업은 엄청난 경쟁력을 얻는다."

 

 


-정신과 육체의 관능적 조화 / 르네상스의 여인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르 불문하고 어떤 사람의 책이든 그 사람의 '첫 번째 저작'이 가장 읽을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나는 작가나 저자가 시간을 통해서나 각고의 노력을 통해 그의 첫 책보다 더 원숙해진다거나 일취월장한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물론 '두 번째 저작'이 첫 번째 저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의 첫 번째 저작이 얼마만큼 엉터리였는지를 말해 줄 뿐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 즉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갈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 사이에 '갈등'이라는 혼탁하고 달콤한 관계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인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북방의 프로테스탄트적인 견해였고, 사보나롤라(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가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거나 당시 교황들이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인간 속에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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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