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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너미즘
역본설 力本說
[명사]<철학>자연계의 근원은 힘이며, 힘이 모든 것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설.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라이프니츠나 베르그송 등의 철학이 여기에 속한다. 비슷한 말 : 다이너미즘ㆍ역동설.


 

 

- 스타벅스/ 이미지 전략. 도시 감성. 미국적인 성공을 동경하는 감성. 글로벌리즘. 향상심.

 

 단순히 커피 맛이 아닌, 현대인에게 뭔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공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단한 성공을 거머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로는 그 공간에서 마시는 음료가 다른 것이 아닌 '커피'라는 데에 있습니다. 커피는 모든 음료를 통틀어 근대가 가진 '잠에서 깨어 있는' 느낌, 혹은 분위기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발자크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커피의 자극은 인간의 한계와 나태함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를 넘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이 서양문화, 특히 근대화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칠 줄 모르는' 지속성의 기본요소이자 근간이 됩니다. 커피가 가진 '잠이 오지 않는 속성'은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듯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음료가 지금처럼 확고히 정착한 데는 상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상인이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그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욕구'를 만들어 정착시킨 것입니다.

 

 

 

- 브랜드/

 물론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좋은 물건을 제공했기 때문으로, 그 마크가 품질보증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정말 품질에 대해서만 돈을 지불하는지는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브랜드 상품은 가격이 지나치게 비쌉니다. 이런 사례의 하나로 들어서 미안하지만, 가령 에르메스 수첩의 경우 속지만도 몇만 원에서 시작해 종류에 따라 십만 원 가까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게다가 사이즈도 독특해서 내키지 않아도 매년 에르메스의 속지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에르메스니까"라는 한마디로 용서됩니다. 오히려 비쌀수록 다른 사람이 쉽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사회적인 지위로 이어지고, 에르메스의 브랜드 가치도 그만큼 높아지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한 병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와인 로마네 콩티와 이만 원짜리 싸구려 하우스와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만 원까지 하우스와인이 백 배 가량 비싼 로마네 콩티보다 맛있다고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취향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단, 그런 사람이 가량 오늘은 특별히 축하할 일이 있으니까 이십만 원짜리 와인을 마시자, 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 됩니다. 기호를 소비함에 있어서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브랜드가 갖는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됩니다.

 


 본래 브랜드는 독자적인 기술로 키워진 품질로부터 시작하여 독특한 이미지와 품격이 거기에 덧입혀지고, 마침내 모두가 동경하는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맥도날드 브랜드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똑같은 것이 똑같은 가게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제공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똑같은 규격의 물건이 제공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안도감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도 느끼게 됩니다.
 로컬 브랜드가 거대 자본에 밀려 쫓겨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그런 것이죠. 예를 들어 인도 거리에서 맥도날드를 보면 우리는 조금 실망하게 됩니다. 맥도날드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활권 안에 체인점이 생기면 좋아할 사람이 아마 더 많을 겁니다. 집 근처에 있는 것은 좋지만 인도에서 만나는 것은 싫다 ㅡ. 우리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똑같다'로는 재미가 없죠. 사실 이 '외부 세계',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이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고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고, 경제의 중심이었던 곳은 브랜드가 되지 않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또한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틈도 없이 붐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중략) , 특히 도쿄 같은 대도시로 갈 경우 도시의 삶에 대한 강한 열망도 있지만, 동시에 낯선 지역에 대한 가닭 모를 두려움과 주눅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가고 싶다, 한번쯤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하는 기분이 대개는 그런 두려움을 억누르죠. (블라블라)
 우리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동물이 무리를 짓듯 하나의 생물로서의 욕구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을 대도시가 충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욕망이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모더니즘/ 근대화/ 그러고 보면 근대화란 녀석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딜레마'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근대는 너무 낙천적으로 성장을 믿었던 게 아닐까', '근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관리당하고 권리를 침해당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근대modern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나온 것이 '포스트모던'post modern입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면서 인간은 상당히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돌아보니 근대의 합리정신 하에 사회는 거대한 관리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기능주의, 합리주의만 추진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탈근대를 지향함으로써 인간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인데, 이 시기에 단번에 유럽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라는 근사한 원형 및 본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때로 돌아가자" 하는 명확한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도전이 실현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뭔가를 이루고자 할 때 그 명확한 모델이 없으면 그런 기분이 들어도 꾸준히 밀고나가 마침내 확실하고도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는 어렵습니다.

 

 

- 경시된 근대의 '신체'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과연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생생히 실감하게 되는 것은 생각할 때보다는 몸을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때입니다. 몸에 힘이 넘쳐나고 온몸 구석구속 피가 돌 때 '아, 내가 정말 이 세상에 살아 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하고 느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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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물론 그렇다. 생각할 수 있는 대뇌를 가진 몸이 있기 때문에 자각할 수 있다. 무엇이 우선인가를 가려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각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몸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몹시 지쳤을 때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몸으로서, 개체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이 답이 될 때도 있다. 또한 내 동생의 경우 생각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나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보여지는 몸의 상태로 상대방에게 인정되어진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까지 생각해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몸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그것이야 말로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면이 있기 때문에 과연 생각하기 때문에만일까 몸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일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존재감있는 현실의 몸으로서 자신을 생각하는 면이 유독 일본문화와 정서에 강한 것 같다. 나는 생각하는 나를 존중하고 싶고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기에 따르는 괴리감에 괴로운 때가 많기 때문에 내가 지향하는 것과 역방향으로 그만큼 나를 끌어 당기는 것이 일본의 문학인 것 같다. 여기에 있는 나, 지나간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마 앞으로의 너를 위해서 지금을 충실히, 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음을 가볍게하고 그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줄 때가 있지, 하고 나를 위로할 수도 있고 잊어야만 하는 건 잊을 수도 있으려고 노력한다. 이건 아마도 그 나라의 특징인 듯 싶은데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유구하게 쌓아올린 과거도 일순간의 지진으로 소실될 수도 있고 수많은 지진 해일로 나라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두려움에 압도되어 미래에 대한 거창함도 마음대로 세울 수 없게 된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과거도 미래도 소중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조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게 아닐까 싶다.

   


원근법은 '인간의 시점으로 본 그대로가 좋다'는 긍정적인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인간의 시점으로 '본다'는 것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에 어울리는 기법인 것입니다. 또한 원근법으로 상징되는 시선의 우위성은 근대에 있어 일관된 원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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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시선에 의한 지배는 지금도 계속도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공위성'입니다. (중략) 만화 『고르고 13』을 보면 인공위성이 가진 위험성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인공위성에서  보내오는 화상을 관리하는 한 기술자가 "신의 시력을 손에 넣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공위성과 현대 첨단기술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감시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누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사람을 지배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만 (/+만화가의 통찰력)

 

 

 

 인간은 합리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합리성이나 생산성 같은 이성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면 자칫 인간성이 파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날마다 아무 고민 없이 사용하는 구글 등의 검색사이트에도 '보여지는 자 = 지배받는 자'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당신이 검색한 것에는 당신의 취미나 기호가 반영됩니다. 당신이 컴퓨터에 입력했던 구체적인 키워드의 목록이나 옥션 등에서의 구입 이력이 유출되었다고 한번 가정해봅시다.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나요?
(중략)어떤 책을 산다, 하는 정도의 사소한 정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의 주요 검색 키워드나 검색 스타일, 구매 패턴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은 그 사람 앞에 완전히 발거벗겨져 서게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정보의 무료화'는 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도 당연히 증가하게 됩니다. 그 결과, 정보의 활용 면에서는 확실히 편해지고 좋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만큼 충실해지고 풍부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진화로 정보의 중요성이 증대된 결과 인간 관계에서의 개인의 중요성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습니다.
(중략) '정보의 무료화'라는 공평해보이는 조건이 사실은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아이러니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렇듯 근대에는 실제의 '눈', 시선과 시점이 권력으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것이 더욱 추상화되고 모호해지면서 '정보를 쥐는 자'가 권력의 중심을 장학하고 있습니다.


 

 

 

 

최근 신체를 통해 직접 얻을 수 있는 충만감, 촉각을 통해 느끼는 행복감, 미각과 후각 같은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이 인기를 얻는 것은 그런 것들이 심신의 균형을 잡아주어 총체적인 행복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맛집투어/ 무분별한 성관계/ 소외-현대인의 고립)

 

 

 


- 제국주의.


 이 '정체성을 둘러싼 싸움'은 세계의 제국사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다시 말해, 구석구석까지 '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런 조금은 엉뚱한 욕심이 남자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야망'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야망을 품고 있기 때문에 향상심을 갖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제국의 야망은 영역을 바꿨을 뿐 지금도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특히 제국의 야망이 가장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은 경제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시계에서는 애플과의 패권다툼에서 승리한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주를 해왔는데, 지금은 구글이 상당 부분 그 영역을 잠식했죠. 패권을 둘러싼 그들의 싸움은 과거 제국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모든 것을 자신이 장악하겠다는 야망은 제국주의의 보질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제국주의에 의한 패권다툼은 금융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하에 시장 개방에 거세게 내몰리고 있습니다. 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은 좀 거칠게 말해 '나의 먹이가 돼라', '내가 너를 먹게 해달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지금은 무력이 아닌 돈의 힘으로 침략하는 시대입니다. (중략) 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제국주의의 최대 문제입니다. 지금 전 세계로 확대되어가는 제국은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쟁의 이면에는 국제금융자본의 존재가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납득이 됩니다. 아무튼 전쟁을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자본은 '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돈을 벌고, 어느 쪽이 이기든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 몬스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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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빈부의 격차'입니다. 자본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이 사회에서는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를 축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속적으로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렇듯 문제가 많고 모순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라는 기관차는 도대체 왜 멈추지 않는 걸까요? 완전한 설명이 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등장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실험이 명백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자본주의는 수많은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데 반해 사회주의는 백 년도 버티질 못하고 붕괴해버리고 말았을까요? (블라) 그것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시스템인 데 반해 사회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습니다.(블라)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자체가 수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몬스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전면 부정하고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적인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반드시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싸움은 시대의 발전과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세력을 확장해가고 머지 않아 세상이 공산화될 거라고 믿었던 20세기 전반기는 인간이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극도로 교만해진 시대였습니다. 즉, 이제까지 인간이 자연발생적으로 키우로 발전시켜온 시스템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낸 인공적인 시스템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믿을 만큼의 엄청난 자신감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근대'라고 하는, 자연은 본능적이고 인공은 이성적이라 여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약간 의아한 일일 수도 있지만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때 어쩌면 그것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시스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행동을 바꾸는 일이 갖는 문제점과 위험성은 비닐봉투 사용 유료화와 같은 좋은 방향일 때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부가, 혹은 시스템을 운용하고 통제하는 집단이 뭔가 나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려 할 때 치명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무슨 일에서든 모든 사람이 갑작스럽게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차이를 만들어내어 차별화하는 것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우선 냉장고, 다음은 텔레비전, 그 다음은 자동차…….' 하는 식으로 무엇이 갖고 싶다 하는 욕구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적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소비는 실제적인 소비보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호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욕망이 이미 채워졌으니 새로운 욕망을 만들 필요가 생긴 것이죠.

 

 

- 사회주의/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피에르 부르디외

 

 확실히 "사람은 경제적인 위치와 수입에 의해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문화 또는 경제적인 기반에 의해 달라진다" 라는 명제는 탁월한 통찰력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 등의 책을 통해 그런 견해를 피력하기 전까지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다,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다, 사회나 사물에 대한 견해 등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르사, 아니 그의 이론이 등장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의하기 시작했습니다.

 

- '평등'과 '독재'는 종이 한 장 차이
 그것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가 왜 필연적으로 폭력에 의한 독재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땅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적으로 자란 나무를 일제히 베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나무만 심는 것과도 같은 부자연스러움과 억지스러움인 것이지요. 그러나 자연적으로 자란 숲의 식물을 전부 뽑아버리고 한 종류의 나무만 심으려는 사회주의 특유의 '플랜테이션 사상'은 인간 사회에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너무도 무리한 방식으로 이루려 했기 때문에 힘에 의한 숙청이 필요했고, 결구 ㄱ그것이 자신의 목을 조여 자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즉,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의 처지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권리인 '파업의 권리'마저 빼앗겨서 노동자의 예속성이 근본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베버의 말대로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혹독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정론'이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로부터 착취 당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 이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여지도 없습니다. 바로 이 '잘못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잘못되어 버렸다'는 점에 사회주의가 가진 '개미지옥'으로서의 공포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 파시즘/
 파시즘의 정체성은 적극적인 자기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다른 것에 무조건 반대해 무너뜨리려는 파괴 본성에 의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일본/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성보다는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감정과 직관 같은 능력의 우위성을 설명하는 '생의 철학'이 사상계에서 조금씩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스터모던의 주류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스터모던의 주류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의 철학으로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갖는 폭력성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곤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ㅙ적이다.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히틀러,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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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조건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은 독일인들은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독일 국민에게 있어 나치스를 지지하는 것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독일인만 비난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 면에서 볼 때 어느 민족이나 당시 독일과 유사한 상황에서 히틀러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슬람을 쵸적으로 삼아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부를 자국에 집중시키려고 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고, 대 이슬람전쟁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의구심과 약간의 두려움마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 종교/
 종교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근대라면, 현대는 그 반동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중세와 같이 맹목적인 신앙과는 또 다른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시대입니다.
(중략)  이 일이 있은 뒤로 융은 환자의 발언을 단순한 망상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그 사람은 그 힘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융은 세계 각지의 신화와 전설을 조사해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조사해보았는데, 그 결과 다양한 민족이 마음 깊은 곳에 '공통해 있는 부분=집합적 무의식'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융이 말하는 집합적 무의식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보통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은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과 밖에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가진 무엇인가를 품고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 종교를 소생시킨다. (블라) 다시 말해,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질서와 안정을 원하는 인간의 감정이 이 세상에 '문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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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