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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시시하게만 살지 말렴.

김곰곰 2012. 1. 24. 19:39

그렇게 조심한 덕에 다행히 몇 년간 나는 참으로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그야말로 안전하기만 한 생활이었다.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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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일에 연민을 가질 줄 아는 남자가 시시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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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말은 당시 나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청춘이었다. 일, 연애, 인간관계, 일상의 안정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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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내가 삶을 좌우하는 그 절대적인 단어를 그렇게 낭비하고 살았다니 심히 반성이 됐다.

 "그리고, 옥 작가 재수 없는 게 내 탓이야? 왜 항상 루저처럼 굴어?"

 "루……저요?"

 "실패도 전염되거든. 나 그래서 옥 작가랑 친해지기 싫은거야."

 사장이 완전히 기운을 되찾고 반격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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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그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 시간 후 그가 우리 집 바로 뒤 공원에 와 있다는 전화를 했을 때도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공원 놀이터의 시소 모양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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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개인이나 인류나 진화의 원동력은 이성을 향한 들끓는 열망인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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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첫사랑을 묻는 장소는 있는 거예요."

+나에게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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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똑똑한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지 않아요. 자기 살 집을 불태우지 않죠."

 "어쨌거나 연구가 잘돼서 인류를 구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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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모르겠으나 그가 유일하게 갑근세에 불만을 품을 자격 있는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내 주위 인간들은 죄다 세금을 내고 싶어도 소득이 없어 못 내는 국민연금계의 투명인간들 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한때 왜 학생회장이 대기업 회사원밖에 못 됐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으나 월급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세상의 월급이 결국 범생이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심오한 메커니즘을 터득한 후 그 의문을 접었다.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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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 역시 영화에서 키스를 배웠다. 어쩌면 그것만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별 쓸모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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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잔인한 사실이 있다.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 최종적으로 두 명이 남으면 외모가 못생긴 사람보다 잘생긴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잘생긴 사람이 못생긴 사람보다 더 많은 긍정의 에너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잘생긴 사람이 좀더 긍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란다. 그렇다, 이렇게 치사한 곳이 세상이다.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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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연우처럼 무한한 긍정의 기운을 뿜어내고 싶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암흑의 우주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리는 잘생긴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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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나의 고집을 끝까지 존중해주려 애쓰는 연우가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그는 훌륭한 어른이 된 훌륭한 어린이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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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급쟁이 인생이란 아무래도 경우의 수가 적잖아. 지금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더 이상 캔버스화가 어울리지 않는 날이 오면 내 젊음도 끝나는거야. 그 후로는 그냥 넥타이 맨 아저씨들 중 하나가 되겠지."

 "너 우리나라 중년 여자 중에 파마 안 한 여자가 몇 퍼센트나 될 것 같니? 늙으면 왜 다 똑같아지는지. 늙으면 변화가 두려워지나?"

 "변화가 두려워지면 늙는 거겠지. 하지만 때로는 나이 먹은 내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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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안한 영혼에게는 우황청심환이나 다름없는 '괜찮아' 라는 말을 십 년 치 몰아 듣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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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캐나다 안 가.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 놔, 자꾸 울지마. 죽는다고도 하지 마."

 남자애가 순정이 철철 넘치는 말투로 여자애를 달래기 시작했다.

 "넌 어차피 캐나다 가면 끝이잖아. 내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지 네가 알아? 사람은 다른 사람 이해 못 해!"

 "미리야. 아 놔."

 "정말이야. 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 (미리, 미리와의, 말만 모아서)

 "너 기억나? 3반 여자애 둘 동반 자살한 거? 근데 한 명은 살았지? 너, 만약 나만 죽고 너는 살아나면 어떻게 할래?"

 

 여자애는 살벌한 주제로 남자애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알지 못해. 알고 싶어도 하지도 않아. 전염되니까."

 

"아는 척하지 말랬지! 제일 싫어. 남의 인생이라고 쉽게 주둥아리 나불대는 인간들!"

 여자애의 목소리에 박힌 상처가 철제 캐비닛을 뚫고 나까지 따끔하게 찔렀다.

 

"캐나다 얘기 그만해! 너 진짜 앞날이 깜깜한 게 뭔지나 알고 떠들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점점 다가오는 거, 그 기분을 아냐고!"

 역시 비행 청소년일수록 장래 고민을 더 많이 하는 법이었다. 여자애는 제법 야무지게 비관론을 펼쳤고 남자애는 쩔쩔맸다.

 

 

 

 

 

 "그래. 미리야. 이름이 미리라서 미리부터 걱정이니. 그리고 불 좀 지르면 어떠니. 얼굴이 이미숙인데. 파스빈더 감독 작품 중에 이런 제목이 있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너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영혼이 그깟 불안과 두려움에 파묻혀서야 되겠니."

 나의 멋진 충고에 잠시 침묵이 뒤따랐다. 미리가 물었다.

 "그……파스빈더가 뭔가 하는 감독 유명해요?"

 "그럼. 완전 천재야. 서른일곱 살에 요절했어."

 "씨이, 것 봐. 이상한 새끼일 줄 알았어."

 내가 파스빈더가 얼마나 온 영혼을 바쳐 열정적인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해도 미리 귀에는 씨도 박히지 않았다.

 "언니. 사람마다 운명이란 게 있는 거예요. 그 운명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어요. 불구경하는 사람은 불 지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거라고요."

 

 

 "이 언니는 참 방정도 디테일하게 떤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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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대한 생각은 늙은이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행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추억을 위한 기념품을 사듯,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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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하. 인간적의 반대말은 연애적인 것이구나.

 이균의 훈계는 내 마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인간적이지도 연애적이지도 못한 언제나 그런 애매한 존재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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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이런 식으로 대충 구분이 가능하다. 나는 결코 내가 연애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특유의 상실감과 박탈감은 선천적인 것이었다. 연애란 단어조차 모르던 꼬마 때에도 나는 바람맞은 삼십대 여자 얼굴을 곧잘 하곤 했었다. 물론 세계와 타인과 관계맺기를 갈망하는 나의 태도를 굳이 연애에 환장한 행동으로 본다면 변명할 마음은 없지만 이균처럼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이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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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그랬죠? 어린애가 웬 걱정이냐고? 암세포도 젊은 암세포가 더 활기차듯, 아픔도 젊은 아픔이 더 센 거라고요. 앞으로 아플 날이 더 창창하니까요."

 아플 날이 창창하다…… 내 생애 그렇게 슬픈 말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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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이런 상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 그는 죽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사람이었다. 고두심 닮은 엄마를 그리워하고 미키마우스를 아끼며 파리에 사랑하는 여자를 데려가고 싶은 젊은 남자가 죽다니. 그 슬픔은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세상의 전부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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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다는 증거죠. 뻔뻔하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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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 손을 타지 않는 곳으로 깊숙이 숨을 뿐이다. 우리가 자꾸 꺼내서 멋대로 치장할까 봐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보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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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바보 같은 여자들이 사랑에 빠지기 쉬운 자리인 조수석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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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인류에게 타임머신이 꼭 필요하다면 바로 그런 어리석은 고백의 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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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렇게 잃어버리는 데 천재였다. 중요한 점은, 잃어버리더라도 무엇을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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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이란 어차피 약간의 억울함을 품고 있는 감정이므로. 마치 그리움은 키 작은 미남과 같아서 우리는 그 서글픈 한계를 따뜻이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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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원래 뒤끝으로 살아요. 뒤끝은 나의 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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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하다니. 옥 작가. 왜 그렇게 젊은 사람이 패기가 없어?"

 패기라…… 아주 좋은 지적이었다.

 "글쎄요. 사장님. 전 자신이 없네요."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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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었다. 엄마와 싸우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는 해도 나쁜 추억이라 하여 추억의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빠가 여전히 잘 살고 계시다는데 배신감을 느끼는 이 심리는 도대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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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부모님의 이혼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일이었다. 그건 나와 좀더 친해지고 싶어 찾아온 '불행'일 뿐이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불행'을 손님이라 생각하고 대충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미련하게 가족인 양 옆에 끼고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바보들은 가끔 그렇게 자신이 '불행'과 '불운'에게 꽤 인기가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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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아플 때 가장 행복하다니. 과연 아이러니는 블랙유머의 핵이었다. 언제나 나는 행복해지기를 바랐건만 그토록 기다리던 삶의 반전이 이렇게 잔인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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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그의 행동은 너무 극적이어서 변명이 필요했다. 세상에 아무 의미 없는 키스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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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경우 전 인류가 사랑에 빠진 채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점은 그 사랑이 가짜라도 인류는 행복을 느끼며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건 가장 바람직한 멸망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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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박사님. 여자는요, 모자랑 같아서요. 처음 봤을 때 나랑 어울리지 않으면 계속 안 어울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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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끝까지 전력을 다해 달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지 않으면, 그래서 넘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걸까. 나는 넘어지지 않고 어떻게든 달렸다고 자부했는데. 오히려 마음 깊숙이 언젠가는 넘어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는지 모른다. 아, 모르겠다. 어쩌자고 인생은 나의 맷집을 과대평가하고 계속 덤비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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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메뉴판과 같다는 것을.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음식을 먹듯, 결국 맨 처음 생각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 김지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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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모은다는 거야. 접근하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것을 굳이 손에 넣으려는 심리가 뭐냐고?"

 미리는 흥분했고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언니. 오늘 갑자기 그 똘아이들이 이해가 가더라고. 인생이란 게 결국 철조망 마니아의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찔릴 줄 알면서도 가지려 하는 그 뜨거운 변태의 마음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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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그럼. 멍청한 애들이나 그 짓 하지. 먹고 나서 배탈 난 식당에 왜 또 가.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살다 보면 옛날 애인 다시 만날 일이 거의 없다는 거야.:

 그건 매우 공감이 가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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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아팠다. 최선을 다하여도 빛나지 못한다는 건, 그냥 가만히 햇살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는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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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한기, 이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