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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간 가장 임펙트 있게 읽었던 책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단연, 아베코보. 모래의 여자. 지금 읽고 있는 편혜영 작가의 서쪽 숲에 갔다, 에서 약간 그런 냄새가 난다. 


1. 속도가 난다.

2. 궁금하다.

3.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4. 결국은 그것은 어떤 패턴이나 반복, 인생에 대한 것.

5. 문체가 멋이 있다. 문장이 매력적이다.

6.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다.

7. 모래와 숲, 대 자연 앞에 인간의 무력함과 담합과 반복.



 집중력과 가독성이 떨어져서 올해는 소설을 읽는 빈도가 굉장히 줄어들었는데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더니 활자가 눈을 통과해 머리로 슈슉 들어왔다. 잠을 자도 그만이지만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고마웠고 나도 잠을 줄이는 기꺼운 희생 정도는 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 덕분에 외우진 못했지만 매출이랑 입하율 자료도 한 번 살펴봤고 소설도 집중해서 읽게 됐고 더 읽고 싶어졌고 이 작가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지만 대체로 겁이 많고 성정이 순한 사람들은 우물쭈물하다가도 직함에 눌려 기어이 대답을 내놓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박인수는 얼굴을 붉혔다. 숲에 대해 아는 척한 게 생각났다. 하필 6월까지 응달의 눈이 녹지 않는다는 얘기는 왜 했을까. 그 얘기를 하더라도 어쨰서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는 걸 밝히지 않았을까. 수치심을 감추려고 따지듯 물었다.



실제로 박인수에게는 부끄러움이 가시고 자기에게 마땅한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어떤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나저나 사내의 형이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점임자는 이 사내와 비슷하게 생겼을까.




 그 이후 이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치통'이 되었다. 형은 이가 약했다. 자주 치통을 앓았다. 한 달이면 서너 번은 죽는소리를 했다. 이제까지는 형의 기분이 좋지 않을 떄, 형이 그에게 비웃음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 부모가 그를 칭찬할 때, 그가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돌아왔을 때, 형이 낮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깨어났을 때, 그러니까 '아무 때나' 맞았다. 앞으로 치통 때문에 맞게 되더라도 아무 때고 맞는 것은 똑같았다. 

 형에게는 '아무 때나' 치통이 왔으니까. 다만 맞는 이유가 생길 뿐이었다. 



 형을 보지 못하는 동안 평화로웠고 형이 다시 나타나자 평화가 깨졌고 형이 미래의 평화까지 위협할까 겁이 났다. 




그럼에도 언제나 실패한 느낌이었고 간혹 칭찬을 받을 때도 수모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가까운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으로 모욕과 비난을 받는 것은 그를 수치스럽게 했고 위축되고 주눅 들게 했다. 






 그녀는 늙은이 주제에 다부진 근육질의 사내들이, 그것이 젊은 시절을 막노동으로 부지한 증거인 것 같아 여전히 불쾌했고 몸뚱이만 크고 징그러운 다족류 벌레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눈으로 덮이면서 마을은 동면하는 짐승처럼 묵묵해져갔다. 




 이하인이 웃음 띤 얼굴로 인사했다. 진하경도 활짝 웃었다.

진하경은 생전 처음 본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허술한 공모 의식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꼭'이라는 말을 써서 약속임을 강조한 것도 좋았다. 





 달궈진 쇠는 발정한 짐승처럼 쉽게 식지 않는 법이다. 발정난 짐승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쇠도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달궈졌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색깔 때문만은 아니다. 공기 때문이다. 달궈진 쇠는 공기를 바꾼다. 뜨겁게 달아오른 쇠가 뿜어내는 열기는 공기를 눅눅하게 하고 입자를 무겁게 해서 숨구멍을 막고 목을 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최창기는 진하경이라면 묻지 않은 것까지 대답해주었으리라는 걸 알았다. 만날 몸을 배배 꼴 정도로 심심해해서 누군가 들어줄 사람만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말조심 좀 할 것이지. 여자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만 빼고 무슨 말이든 다 해대니까. 특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얘기라면 좋아하면서 지껄이지. 이 마을에서 오래 산 늙은이라는 건 굳이 비밀도 아니지만. 




그는 본성적으로도 그렇고 산술적으로도 인간은 속임수를 쓸 때보다 정직하게 굴 때가 많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했다. 



진과 얘기할 때 좋은 점은 장황하게 이유나 사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간결했고 명쾌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얘기를 하고 돌아 나오는 길이 석연치 않기는 했다. 뭔가 잘못한 게 아닌지, 좀더 생각하고 대답했어야 하는 것 아닌지, 사정을 덧붙여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지 후회가 되었다.



아내는 늘 그에게 이유나 사정을 캐물었고 변명할 것을 요구했고 뭔가 잘못한 게 없는지 따져 물었다. 진과의 대화가 그를 자책하게 한다면, 아내와의 대화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질리게 했다. 

 그는 아내의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질문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질리고 지치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이유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데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니까. 기억은 대부분 그렇게 작동했다. 아는 걸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게 효과적인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사무장님이 워낙 문학적이어서 많이 늘었습니다."

 "마약이 아니라 마약 같은 거요. 처음에는 한없이 좋았지만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빠져들어 결국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게 마약입니다. 그런 게 있을 겁니다."

 "흠, 여긴 작은 마을이에요. 주민들도 수가 적어 그런지 서로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 같고요."

 "참 나, 모르시는 말씀. 원래 마약은 아는 사람들끼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 껴줬다가 들통 나는 겁니다."

 "마약이 아니라면서요?"

 "그러니까 이혼만 담당하시는 겁니다. (블라블라)

 "친하다는 거 말입니다. 가족처럼 친하다는 거요."

 "네."

 "변호사님은 가족하고 친하십니까?"

이하인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가족 얘기는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었다. 






 간혹 누군가 큰 소리로 한탄을 늘어놓고 불행한 과거를 털어놓았는데, 누구도 그 불행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 무심함에서는 불행이 자신을 비껴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얼마간 시간을 더 보내면 좀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정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정보들 간의 연관 관계가 점점 더 많아져서 그 관계를 해석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게 다일까. 단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일까. 자료와 정보는 아무리 많아도 자료와 정보에 불과했다. 아무리 많은 정보도 세계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했다. 하나의정보가 또 다른 정보에 연결되어 곧 그가 파악해야 할 정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는 걸 꺠닫게 할 뿐이었다. (블라블라) 생각해보면 애당초 알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진실을 파헤치려면 우선 사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사실에 대해서만이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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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숲에 

갔다, 편혜영.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