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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어딜 향해 이야기하는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도무지 모르겠어요 포도는 너무 예뻐요 농약이 묻어 있을까봐 흐르는 물에 오래 씻은 컴컴한 보랏빛 포도 포도는 신사임당을 떠올리게 해요 치마폭에 그려진 포도 어릴 적 삽화에서 보았거든요 신사임당을 쓰자마자 갑자기 불안해져요 포도 물은 잘 안 빠지잖아요 포도를 먹다가 옷에 흘리면 안 되는데 물이 안 빠지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 없이 포도를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일 일어날 걱정도 없이 술을 먹는다면 좋겠어요 술은 아무 죄도 없고 그렇다면 도무지 어디 가서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과거도 미래도 아무런 죄가 없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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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주의자들, 김이강.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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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단어의 흐름 속에 생각이 옮겨간 자리가 모래를 훑고 간 물결처럼 보인다. 노련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제 나이에 맞는 글을 쓰면 되고 읽을 수 있는 모든 글을 읽어두면 된다. 서툴다고 코웃음 치기는 쉽지만 꾸준히 이 모든 글을 써냈다는 것에는 경의를 표한다. '끝'이라는 건 뭘까. 끝을 안다고 하면 우리는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신사임당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식의 흐름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라고 해도 썼을 거 같고 마음에 안들고 뭐랄까 부끄러워지지만 그래서 또 기억에 남는 단어가 된다. 역사 속에서만 배운 인물이 현실 속의 물건을 통해 나에게 이질적인 생존감을 갖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고 그 사람의 모두가 아는 역사, 그 인생이 두려움이나 불안을 몰고 올 때가 있다. 그래서 아무 걱정이나 회환없이 포도를 먹을 수 없는 이 흔들리는 젊음 뿐인 지금. 목이 늘어난 티에 아낙네 포즈를 하고 포도물을 뚝뚝 흘리면서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삶이 오면 그 무감각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을 다한 빛나는 매 순간이 창피해서 비웃어버리는 나이. 작가는 82년생이라고 한다. 동년배라면 동년배이고 나보다 삼년을 더 살았는데 그의 시집을 읽는 동안 계속 떠오른 단어 하나는 '젊다'는 것. 아직 젊고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글만 쓴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내 과거도 내 미래도 아무 잘못이 없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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