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혹은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본뜻이 'You never know'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면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다..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려고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려가도록 합시다. 편애한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이예요. 다들 콩커풀을 준비하세요.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블라블라) 그런 그가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어요. "쓰카다 씨, 사람 고기를 먹은 건 쓰카다 씨만이 아니에요." 살다보면 우리도 가끔 쓰카다 씨와 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위로는 그게 너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음성 자체랍니다. - 깊은 강/ 엔도슈사쿠, 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김연수.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마루야마 겐지가 불안감이 감도는 회사 책상에 앉아 난생 처음으로 소설을 쓰는 그 광경은 애잔하기만 하다. 이건 고시 공부하듯이 절에 들어가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소설을 쓰는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식의 소설 쓰기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블라블라 중간생략 마루야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머릿속이 얼마나 깐깐하고 복잡한 사람이었던지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서 요양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신경쇠약이니 예전에 읽던 심각한 책은 의사가 읽지 못하게 하는 통에 병상에 누워 가볍게 읽을 만한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해 근 2천 권을 독파했다. 그러고 나서 반 다인이 뭐라고 외쳤던가? 2천 권의 추리소설에는 도합 2천 명의 범인이 나온다, 라고 외쳤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
그 즈음 나는 조울증에 시달렸다. 아주 사소한 일에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오르내렸다. (중략)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오줌이 묻은 양철 집게를 들고 서서 나는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담배꽁초를 줍는데 다시 배시시 웃음이 터졌다. '이러지 말자' 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내 머릿속으로는 공자님이 이른 아침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만 하는 부대 화장실에서 집게로 담배꽁초를 줍는 내 소매를 붙잡고 '김 일병, 이러지 말자. 우리 아무리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라고 애원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잘 알겠습니다. - 청춘의 문장들, 제발 이러지 말고 잘 살아보자, 김연수.
「하와이라……」 아버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하와이'란 말을꺼낸 것은 내가 열네 살 때 설날이었다. - GO, 카네시로카즈키. 2008년 1학기라고 생각된다. 현대소설의 연구? 이해? 이런 수업을 들으면서 한 학기 내내 이 소설 하나만을 읽었다. 정말로 질릴 정도로 읽었는데도 실수 했고 선생님은 쌍욕이 나올 정도로 과제를 내주고 질문했다. 그렇게까지 치달았지만 소설, 이라는 것을 내버릴 수 없었다. 질리기는 커녕 질릴 정도로 읽었는데 역시 좋아한다, 고 깨달았다. (내 인생을 둘러싼 세 사람의 남자처럼) 고생을 하더라도 많이 틀리고 실수하더라도 이거라면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첫 문장을 떠 올릴 수 있었다. 첫 문장을 떠올리니까 그동안 고생하며 읽었던 구석구석의 내용이 스쳐..
그렇다. 글을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게 어떤 능력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연수 시인 말대로 나는 글을 쓸 때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오에 겐자부로의 말처럼 책을 읽는 것이 다른 이들에 비해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읽는 일도 쓰는 일도 다루는 일도 다른 어떤 일에 비해 괴롭지 않다. 할 수 있다. 엉덩이 힘만은 꽤 봐줄만 하고 명석하진 않아도 예민하다. 디테일이 생명. 사내전화번호부에 틀린 이름, 사사에 틀린 책제목, 맞춤법, 출판사 분들이 가져온 새 책을 훑어보다가도 틀린 글씨가 보인다. 이것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늘 거기에 레이더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재미없는 걸 견딜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구매는 견딜 수 없지만 번역이나 글을 다루는 일은 견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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