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순서입니다. 이유를 알아야 선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겁니다." "아뇨, 제 순서는 달라요. 이유를 말했는데도 선택도 받지 못하면 둘 다 잃게 되는 거니까요." "패를 먼저 보이지 않겠다는 거군요." 엉성하게 얹어둔 귤 하나가 떨어져서 아래로 굴러갔다. 송미는 잠깐 쉬면서 그 귤을 계속 보았다. 귤은 빠른 속도로 굴러갔고 송미도 그 귤을 따라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 귤을 찾아오고 싶었지만 다시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다. 외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송미는 그 언덕과 귤을 떠올렸다. + 할머니의 죽음을 서서히 학습해가면서, 계절이 바뀌면서 내가 막연히 느낀 건 이제는 그 누구의 집에서도 화사하게 베란다에 가득 꽃이 피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
사람들은 잡문이라 하는데 난 에세이 쓰는 것도 참 좋아한다. 내 생각엔 단편, 장편보다 작가에겐 에세이가 삶의 촘촘한 기록이 되는 것 같다. 어떤 짧은 글이라도 그 글엔 사색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소설가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중략) 이 속된 도시에 환멸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그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연민마저 느껴진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이 도시에 함께 사는 게 좋다. 고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뻑'과 '자학'의 진폭을 견딜 만한 심장을 지녀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치게 '자뻑'으로 가거나 지나치게 '자학'으로 가지 않게 스스로의 삶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선 그 진폭이 마치..
놔두자니 쪽팔리고, 태우자니 아까웠다. 그 일기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스무 살을 보냈는지가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진다. 거짓말처럼 젊은 시절의 고뇌와 허무와 마음의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 시작이, 처녀작이 그 작가의 모든 재능의 함축이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 글쎄, 사람에겐 저마다의 빛나는 시기가 정해져있는지도 모르지 하고 추워지기 전에 우리는 각자의 말을 이야기했다. 재능이나 젊음이나 갈수록 그 빛이 바랜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마음가짐, 노력, 성실함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빼어난 재능이라곤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성실함이라는 덕목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나빠질 수 밖에 없다면 잘 갈고 닦아서 오래 지속될 수 있게 하는 게 서글프지만 최선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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