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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든 주식이든 사연이 많은 건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기야 사연으로 따지면 나처럼 사연 많은 아이도 없을 거다.





 "야가 너무 순진타 아이가. 니 나이 때는 춤도 추고 깔나게 놀기도 하고 연애도 쪼매 하고 그러는 기 재미 아이가. 너무 순진해도 몬쓴다."





사실 나는 순진한 아이들은 싫다. 최소한 껌이라도 씹고 다리라도 떨어야 상대하고 싶다.







 나는 모르는 척 홍야홍야 그냥 잠이 들었다.









 언니가 순순히 나와 준다고 하니 울컥 고마움이 일었다. 이런 사소함에 너덜너덜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도 좀 웃긴다. 역시 가족이라는 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와 위기 상황일 때 서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나 보다.





 나를 이 꼴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했겠지. 그런 인간을 믿고 잠시나마 고마움이 감격했던 내가 한심한 년이다.





 "내가 아빠 회사 직원이에요 뭐예요? 당장 사람 구해요. 지금 내가 한가하게 아빠 일이나 돕게 생겼어요? 아빠는 내가 수험생으로 안 보여요? 미술 공부 좀 하고 싶다고 애원하는데 그깟 학원도 몇 달 못 보내 줘요?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다고요! 내 몸이 이렇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아빠 책임이에요. 딸이 하마가 되도록 살 빼란 말 한마디 해봤어요? 나한테 일 시킬 생각만 했지 헬스클럽 가 보라도 한 적 있냐고요?"

 사실 언니는 공부에는 취미가 없어도 그림 그리는 건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디자인이나 미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고 할까.

 "누가 대학 가지 말래? 그깟 대학 아무 때나 가면 어떻다고 그래? 그리고 네 성적이 지금 대학 갈 만큼이나 되냐?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아빠 일 좀 돕는 게 뭐 어떻다고 이 야단이야? 그리고 네가 게으르고 먹는 것만 밝혀서 그 모양으로 된 걸 누굴 탓해?"

 "내가 아빠 일 거든 게 지금 몇 년째예요. 이래 갖고는 영원히 대학 못 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난생처음으로 아빠한테 부탁했잖아요! 다른 아이들은 독서실이다, 학원이다, 과외다 난리 치고 있는데 나 집구석에 처박혀서 이게 뭐냐고요.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건 무임금 노동 착취예요. 악덕 고용주나 하는 짓이라고요!"


 "어디서 내 핑계야! 넌 내 일 안 도왔어도 대학 못 갈 놈이야. 게을러 터져서 틈만 나면 곰처럼 잠만 자잖아. 그리고 너, 한 번이라도 아빠 입장 생각해 봤어? 맏딸이면서 말이야. 무임금 어쩌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가족끼리 그런 거 따지면 못써. 내가 너희한테 빚쟁이애 뭐야? 너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아유,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게 다 자식 복 없는 내 탓이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

 "그런 아빠는요? 아빠는 진짜 이기적인 인간이에요. 자식 앞길 막는 저질 악덕이라고요!"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관리 받는 년과 방해 받는 년. (블라) 아무리 똑같이 놀았다 해도 본질적으로 그 아이들과 나는 삶의 질부터가 다르다. 그 아이들은 마음 놓고 놀아도 최소한 안전망이라도 있지만, 나 같은 아이는 그물망조차 없어 바닥을 지나 지하 3층까지 떨어질 수 있다.








 책에서 만난 톨스토이는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실제의 톨스토이는 평생 질투와 욕망에 시달렸고 더욱이 젊은 시절 주색잡기와 가출, 부부 싸움 등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 본 인물이다. 그가 특출난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것은 여울의 입을 빌렸지만 작가의 말이다. 신경숙의 작은방에서도 마찬가지고 오쿠다히데오의 존레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면 다 말 못 할 그만의 사정이 생기거든. 본래의 마음하고 다르게 말이야.

 삼촌의 마지막 당부이 콧등이 시큰거렸다. 떠올리기도 싫은 사실들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재주가 삼촌에게는 있다. 이 집에서 삼촌 하나만은 엄마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이런 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민, 한 번밖에 안 본 그 아줌마가 이 상황에 떠오르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집을 나가는 건 늘 내가 꿈꾸던 일이었는데 그들이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치며 떠났다. 이 개 같은 기분이라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황당할 뿐이다.






하지만 류은이에게는 다른 여자아이들이 갖고 있는 질투나 열등감이 없어 보인다. 늘 해맑고 여유가 있다. 나와는 반대의 성격이다. 저런 여유로움은 아마도 부족함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깎아내리거나 시기하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류은이가 좋다.






 아, 저 남자를 개척하고 싶다.





나는 고양이를 꼭 껴안았다.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우울함도 조금은 떨칠 수 있었고, 엄마의 빈자리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고마워,









 가난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지 않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나는 그걸 참을 수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뭐든지 참고 견뎌야 한다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불 보듯 뻔한 상황애 끼여 아등바등하느니 다른 길을 가 보고 틈도 엿보고 싶다. 언제든 상황은 바뀐다.






 재미있는 일들만 생각하고 싶은데 이놈의 집구석은 사람을 깃털처럼 가볍게 놔두질 않는다.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이 감당이 안 되어 본의 아니게 서로를 괴롭혔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나는 다른 가족의 삶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지금 혼자 남은 이 상황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화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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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가족 레시피, 손현주. 문학동네.


+ 자란다는 것. 아메바처럼 유동적인 형질을 가지고 이리저리 끊이거나 터지지 않고 확장해 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