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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각오

김곰곰 2012. 1. 23. 01:59

설사 그 당시에는 그만큼의 각오가 서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숙한 인간으로서 과거를 뒤돌아볼 필요가 생겼을 경우에는 내가 져야 할 만큼의 책임은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심정으로 그의 말에 찬성했던 거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보기에 아주 열악한 처지에 놓인 그의 의지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전혀 강해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네. 그는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어.
(...) 내가 보기에 그는 자제와 인내를 확실히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아.
-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점점 과민해져갔지. 나는 너무나 침착한 그를 보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원망스럽기도 했네.

그가 지향하는 곳은 나의 그곳보다 훨씬 높았으니까.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높은 곳만 바라보고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어긋남'이지. 스스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세.

 

 

 

 

 

 

 

물론 그는 자기가 가고 싶다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지만 내가 가자고 부추기면 어딜가든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입장이기도 했네. 나는 왜 선뜻 나서지 않냐고 물었지. 그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대답했네.

 

 

 


마침내 우린 더위 때문에, 목마름 때문에, 끝없이 내닫는 발걸음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에 들어설 수 있었지. 그때 우리는 마치 외길 위에서 만난 나그네들 같았네. 한참을 이야기해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짜내 대꾸해야 할 만큼 복잡한 문제들은 입에 올리지 않았거든.

 

 

 

 

 

 

 


만약 그녀의 마음이 나 아닌 K에게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면 내가 품은 연정은 새삼 입 밖에 낼 가치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네. 창피당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하면 정확한 변명이 아니야. 아무리 내가 사랑한다고 해도, 내 사랑을 받는 사람이 마음속에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난 그런 여자와 함께하고 싶진 않았지. 이 세상에는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은 운 좋은 사내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남자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둔한 사람이라고 난 생각했네.

 

 

 

 

그는 무서울 만치 심지가 굳은 사내였지만 그런 한편 너무나 솔직했기 때문에 자기모순을 지적받으면 결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약간 안심했네. 그 순간 그가 불쑥 "각오?" 하고 물었네. 그리고 내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각오라ㅡ각오 못 할 것도 없지" 하고 덧붙였네. 혼잣말로 읊조렸어. 꿈속에서 말하듯이 말이야.


 

 

 

 

 

 

 

 

 

 

 

 

 

 

-

나츠메소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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