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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는 자거나 책을 봤다. 나를 두고 변했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책은 성장소설이나 자서전을 주로 읽었다.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에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고 싶었다.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 쉽다. 반 성적을 한두 등수 올리기 위해 코피를 쏟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천재였거나 너무 쉽게 천재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실화라고 해도 현실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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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하진 않지만, 김학찬. 문학동네.








+ 다 읽었다. 일찍 자려고했는데 그냥 밖에서 놀다오는 게 더 빨리자는 방법일 듯 하다.

 중학교 때는 공부해도 안해도 고만고만했다. 특출나게 공부 열심히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안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모 아들, 삼촌 딸과 함께 동갑내기 소띠 삼 형제 중에 가운데 였는데 스트레스도 안받았던 거 같다.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둔한 여자 애 였다. 얼마 전에야 깨달았지만 기왕이면 딸이 공부 잘하고 예뻤으면 우리 엄마아빠도 좋아했을텐데 나는 왜 그리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을까. 아하하하하.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재촉하지 않으셨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드린다. 회사에 와보니 재촉하는 사람들이 천지다.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다. 딱히 필요 이상의 시간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말이 새버렸다.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무얼하고 싶은가, 에 대해 꽤 열심히 고민했던 청소년이었던 것 같은데 성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둔했던 게 다행이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예민하고 우울했으면 고 3이라는 시간을 아예 견뎌내질 못했을 거 같다. 그땐 야자하면서 유란이랑 선정이랑 많이 웃었다. 지금보다 말랐었고 여드름도 더디 났고 성장 발육도 많이 늦었다. 성향이 바뀌었다기보단 아마 덜 자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중간 구석 쯤에서 열심히 내가 아는 노래들을 반복해 들으면서 어른의 책을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못하고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밤늦게 다니는 걸 안좋아해서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갈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많이 빌려읽고 생일 때마다 책을 선물 받는 게 참 좋았다. 중학교 때는 쥐스킨트랑 바나나를 열심히 읽었다. 한수경하고 최예슬과 함께. 고등학교 땐 진이랑 정림이한테 노르웨이의 숲을 선물 받았고 심지어 나은이에게는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책을 빌려 읽었다. 이지은하고 카프카에 나오는 아저씨 흉내도 내고 이선주하고는 절판된 익숙한 그집앞 얘기도 하고. 문제집은 노란색과 검정색이 들어간 걸 선호했던 거 같다. 뭐가 좋은지 보는 눈이 없으니 색이 마음에 드는 걸 풀으라고 이길안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그때부턴 정말 명쾌하게 표지 디자인하고 내부 편집이 눈에 시원시원한 걸 골라 풀었던 거 같다. 혀 안에 방울을 굴려가면서. 그래도 인생에 대한 심각하고 중요한 고민에 대한 기준은 그때 다 세웠던 것 같은데, 아주 평화로웠다. 매일이 온화하고 미지근한 물 같았다. 생각해보면 1학년 때는 괴로웠다. 그래도 중학교 땐 13등 밖으론 나가본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평준화 아닌데서 시험보고 갔더니 죄다 반에서 15등 하던 애들이 400명 모여있다보니 고 1 땐 갑자기 41등인가 2등인가를 했다. 참으로 당황스럽고 괴로웠다. 미라랑 222번에서 얘길하다 갑자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괴로운 줄 몰랐는데 얘길하다보니 서러웠던 모양이다. 모의고사를 봤는데 그건 꽤 잘 봤던 거 같다. 뭐, 순전히 운발이었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던 거 같다. 하나는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수학이나 영어없이 국어와 사회로만 이루어진 성적이라 3학년 때까지 내리내리 비슷했다는 반전이 있었지만 아무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통고도 알아보고 자퇴도 생각해봤지만 성적때문에 피하지 말고 학교에서 한 번 더 잘 해보라고 지명이형이 얘기해주었다. 정말 어른 같은 지명이였다. 그래서 한 번 해볼까해서 기말에서 반을 뛰어넘어 21등(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2학기 중간에서 17인가 암튼 11등 쯤으로 마무리했던 거 같다. 그리고 2학년이 되서는 7등인가까지 올라갔던 거 같은데 이유는 기억이 안나고 제발 빼달라고 사정해서 여름 보충학습을 안나가고 성적이 하향세를 그렸..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공부하는 게 누군가의 자리를 뺏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서웠다. 그리고는 연애와 함께 행복하게 책 읽으며 일기쓰며 라디오 들으며 지금과 비슷한 라이프 패턴 확립. 3학년 때는 내 인생 최고의 불행ㅡ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던ㅡ이 찾아와 공부고 뭐고 단돈 얼마라도 벌고 싶단 생각을 잠깐 했다.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다.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으니, 정확히는 사라졌으니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러나 안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공부를 했고 서울연고대 갈거 아니면 다 똑같지, 하고 너무 일찍 체념했던 거 같다. 과외도 안하고 보습 특강 같은 거 좀 다니면서 야자하고 여름방학 땐 급기야 사이버대 갈까 소리를 하며 엄마를 앞에두고 신문을 펼쳐봤던 기억이 난다. 그 날의 쨍하고 밝은 여름 햇빛, 미원빌라 마루바닥, 그 신문, 발톱 깍던 엄마까지 다 생각난다. 그때 엄마가 니가 어쩔라고, 왜 그러니 뭐 그런 잔소릴 했으면 진짜 사이버대를 거가나 대학에 안가거나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그래 그러렴 좋을대로 하거라, 라고 말씀하셨고 '아 이건 아닌가벼' 생각하고 그냥 수능까지 얌전히 학교에 다녔다. 

 물론 소박했지만 목표도 있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일희일비하기도 했었고 결론은 선택과목에서 망해서 원하는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재수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여기가 다니게 될 학교인가봐 사전 방문 해보곤 잘 다녔다. 그래서 또 경쟁의식 같은 거 없이 책을 읽으며 뭔가를 글로 해볼 순 없을까 생각하면서 다녔던 거 같다. 쓰다 보니까 후회도 든다. 그때 너무 멀리 보지 말고 눈 앞의 것만 보고 발 좀 구를걸. 하지만 큰 틀에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했던간에 인생은 내가 추구하는, 타고난 거대한 운명 같은 것 안에서 끼워맞춰지거 굴러가는 거 같아서. 그나저나 눈 앞에 가야할 학교도 없는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게 되고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나이가 드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소중한 지금이, 결혼을 해서 책임이 있다거나 학생이어서 미완의 느낌이 들지 않는 아무리 펑펑 틀어도 끊기지 않을 것 같은 수돗물 같은 청춘이지만 낭비하면 물값이 많이 나오든 물부족 국가에 살고 있어서 물 자체가 없어지든 뭔가 희망적인 결론은 아닐거다. 잘 살아야지.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