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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시드니

여섯번째 날

김곰곰 2017. 1. 6. 22:10

하늘이 파란데 하얀 달이 떴다. 아직 밖이 이렇게나 환한데 달을 볼 수 있다니. 이거 평범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문득 재작년 생각이 났다. 아직 새해가 된 지 며칠이 안지나서 새해나 작년에 대해서는 할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2015년은 너무나 길었고 너무나 슬프고 힘든 일이 많았다. 이제야 겨우 그 일들을 조금 되짚어볼 힘이 생겼다. 그 모든 기억을 환하게 감싸줄 만큼 행복한 일도 많았다. 그 계절을 기억하면 말을 못하겠는데 자꾸 전화를 해서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내려다 봐야했던 색이 없던 그 날의 탄천과 그와 반대로 무척이나 화사했던 봄 꽃들. 말 없이 오랜동안 몸을 씻었던 텅 빈 목욕탕, 하룻밤 병실에서 곤히 잠든 할머니와 엄마와 복도의 불빛을 바라보던 일, 야윈 몸으로 할머니를 내내 쳐다보았던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무척이나 많이 소리내어 울었던 둘째 이모와 소리도 못내고 흐느끼던 우리 엄마. 모두를 앞세우고 뒤에 서있던 할아버지가 반듯하게 서서 몹시 슬프게 어깨를 들썩이며 양복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 할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 그렇게 울어주었다면 두 분은 더 행복하게 지냈을텐데, 영영 서투른 어떤 사람들. 할머니를 보내드리던 날의 흐린 김천 시내, 검은 물빛, 말이 없던 고속버스 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되서 갑자기 동생이 털썩 주저앉은 일. 그 말을 전해들은 날의 무너지는 마음. 왜 조금 이상할 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너무나 이상한 일들이 많았는데, 아프다는 말도 없는 아이가 몇 달이나 구부정하게 걸었는데 곧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보냈던 무심함이 가슴을 찢어놨던 날들. 그 와중에 어처구니 없던 퇴사. 동생의 입원이 너무나 마음 아팠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집중할 수 없던 날들. 결혼 준비도 했어야 했는데 거의 한달을 병원에 몸과 마음이 메여있었는데 그럴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나에게는 그런 동생이기 때문에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게 있을 수 있게 이해해준 신랑이 있어서 감사했던 날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애를 보내고 또 며칠은 할머니에 동생까지 감당할 슬픔이 너무 컸던 날들. 집을 빼야했고 우리 둘이 세 정거장을 몇 번 씩이나 왔다갔다하며 시댁 방 한칸을 온통 짐으로 가득 채웠던 계절이 지나고 찬 바람이 살짝 불던 가을 날, 결혼을 했다. 간간히 남대문에 가서 유기 그릇도 보고 돈 쓰는 김에 할아버지 선물도 사고, 결혼 반지를 사러 학원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신랑하고 시어머니를 만나고 어느 날은 남산의 큰 호텔에 가서 시계를 사는 호화스러운 날도 있었다. 그날 점심은 장충동 디자인하우스 골목까지 가서 뭘 먹었다. 혼수 같은 것 일절 하지도 않고 받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머님이 베풀어주신 기꺼운 사치들이 내 기분을 조금은 풍족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살면서 이런 보석 받을 일이 잘 없으니 엄마가 사줄 때 받으라고 해주신 말씀이 와닿았다. 어머니는 정말로 해주고 싶으신거구나, 이 마음이 내 인생에 두고두고 큰 언덕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과일 하나, 그릇 하나, 흔치 않은 카메라를 보내던 엄마에게도 고맙다. 마음이 인색한 나 대신 엄마 아빠가 많이 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받은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우리 신랑. 정말로 선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 비가 오는 게 그렇게 걱정일 수가 없던 밤. 어처구니 없게도 왠수같은 그 회사 코 앞에서 그 지리한 여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생각하며 잤다. 지금 생각하면 헬퍼 이모님하고 플래너님한테 죄송하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끝나버렸다. 결혼식이라는 것 자체가 약간은 허망할 정도로 기억 나지 않아서 감사도 충분치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해엔 제주도를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 모두 참 좋았다. 상실이 컸지만 친구 덕분에 가벼워질 수 있었고 두려움이 컸지만 신랑 덕분에 잠자고 먹을 수 있었고 마지막 10월의 제주도는 너무 아름다웠고 무척 즐거웠다. 자취방 같았던 숙소도, 같이 놀았던 친구들도 오랜동안 기억하게 된다. 내 인생에 가장 진했던 한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기억나는 해.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밖에 없던 매일이 간절했던 평범한 날들. 이 모든 일을 보챔도 성냄도 없이 나의 맨 얼굴을 모두 지켜봐준 신랑이 있어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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