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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시드니

기쁨의 역치

김곰곰 2017. 3. 10. 16:43

역치 :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



1. 조별 과제의 지옥

나에게는 오늘 여러가지 자극이 있었는데 학교의 조별 과제 마감일을 나와 다르게 아는 조원과의 대화를 통해서 혈압이 상승. 그 뒤로 못하는 영어로 친절하게 얘기 하려고 하니 비굴해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틀린 걸 알려주는데도 되려 숙제를 못 내놓겠다, 날짜가 바꼈다, 니가 연락해라 등으로 말이 바뀌니까 짜증스러웠다. 학교 다닐 때도 같이 하는 과제를 할 때 이랬었나? 기억이 없다. 조별 과제가 필수인 수업 같은 건 알았다면 피했을거고 모르고 들었어도 여자아이들 특성 상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늘 하루의 기분이 이걸로 결정되어버렸다. 오늘의 기분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럭저럭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이건 해소가 된다기 보다는 그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거다. 예전에는 문제가 생긴 일에서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기분이 나아졌던 것 같은데 이제는 확실히 고쳐지지 않으면 그게 짜증스러운 것 같다. 이거 결혼 이후에 생긴 성향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2. 배송업체에 고함

아,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 게다가 아이폰 깜둥이가 온 날. 그리고 오랜만에 비도 안오고 정말로 쨍하다. 저 모든 기분을 뒤로 하고 물건이 도착했다는 메일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포스트 박스 열쇠가 없었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물건을 찾아왔다. 여기서 하나 좀 기분이 쎄했던 건 폭신폭신한 버블 커버가 아닌 달랑 비닐 한장에 둘러쌓여 홍콩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배..백만원 짜린데 이건 좀 너무 하지 않니 호주의 온라인 쇼핑몰아. 나는 아주 예민한데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인간이란 말이다. 가능하면 안전장치를 두란 말이야!



3. 이 비싼 아이폰아

핸드폰을 꺼내 유심 칩을 갈아끼고 몇 가지 앱을 깔고 아직 스티커도 다 붙여논 채로 떠듬떠듬 오랜만에 아이폰을 만져본다. 유심을 꽂았는데 측면이 매끄럽지 않고 꽤 만져진다 이건 내 폰의 문제인지 이 종류의 특징인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난다, 생각보다 화면 터치감이 즉각적이지 않고, 화면이나 글자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작았구나 하고 안 좋은 생각이 세 가지 들었고 그래도 역시 사진은 쨍하다, 이거면 됐지 얇은 비닐에 둘러쌓여 왔지만 뽑기는 성공적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 물론 비싸지만 못쓸만한 금액도 아닌데 어찌나 만지기가 조심스러운지, 나 너무 가성비를 중요시 하는 인간으로 변한걸까. 이것도 결혼 이후로 생긴 거 같은데 조금 더 써보다 보면 알겠지 금액이랑 두고두고 만족이랑 내가 어떤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인지.



4. 세상에 이런 일이 밥맛이 없어

입맛이 없다. 이건 아마도 어제 잠을 통 못잤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 2년 동안은 진짜 먹기 위해 사나 싶을 정도로 맛있는 걸 먹으면 금새 기분이 좋아졌는데 오늘은 기분이 입맛을 이겼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입맛이 시고 밋밋해서 카레 같은 향이 강한 음식을 먹고 탄산 음료를 마셔도 거의 아무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제 밤 꿈에는 나를 못살게 구는 왠 덩치 좋은 아주머니, 아무리 뛰고 날고 도망가도 계속 달려와서 때리고 매달리는지 꿈 내내 힘들었다. 반드시 지켜야하는 약속이 생기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쫓기는 기분이다. 중요한 거래처와의 약속, 내게는 배운 적 없는 과목으로 하는 숙제도 그런 기분이라 아마도 이런 꿈을 계속 꾸는 모양이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그래도 한동안은 숙제는 없으니까 가능하면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해야지. 이 숙제를 하는 동안 난 매번 느렸던 영타가 조금 빨라지고 전혀 하지 않던 영작을 하고 있고 심지어 외국인 친구와 문자로 가벼운 논쟁까지 하고 있으니까 이것도 다 내 삶에 도움이 되리라.



5, 언제나 회사를 그만두면

네번 째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두던 지난 주 이 순간은 후련했다. 언제나 회사를 그만둘 때면 시원>섭섭했다. 아쉬움이 드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그 어느 곳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 보면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처음엔 어려서 두번 째는 경황이 없어서 세번 째는 자의 반 타의 반 언제나 예의바르게 그만두지 못했던 점이 마음에 남는다. 끝의 끝까지 예의가 있고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처음만큼 좋은 끝이 없었다는 게, 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네번 째 회사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모두에게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났다. 그거 하나는 조금 성장한거라고 봐도 되겠지?



6. 대통령 없는 나라

오늘은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와, 당연히 되겠지 하면서도 조마조마했는데 당연한 게 당연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의 이름은 차마 부르고 싶지도 않아. 이로인해 대통령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저 멀리에서 살고 있다. 5월에 새 대통령을 뽑겠지. 따뜻한 봄날의 대통령이라니, 바닥을 치고 서로 보여줄 수 있는 끝까지 보고 나면 헤어지는 게 맞지. 너무 많은 사람의 기대감을 배반했다. 교수님이 한 말로 마무리.


박근혜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옛날에 다 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탄핵되었다고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제 되던 나쁜 짓이 오늘 안 되는 것, 그것이 발전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도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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