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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라면 컴퓨터나 의자와 같은 것을 '존재'라고, 인간을 '무無'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의 주저 「존재와 무」에 따르면 '존제'가 컴퓨터나 의자처럼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스러운 것들을 가리킨다면,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중략) 물론 인간에게 '무'의 측면, 즉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자유의 역량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반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블라) 즉 인간은 사물과는 달리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자기를 선택한 것이 '다른 애인들 중에서'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화가 나고, 그리고 자기가 값싼 것처럼 느낀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이 도시에 오지 않았다면, 만일 내가 누군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이런 생각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슬프게 한다.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 존재와 무










사실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다. 사랑에 빠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타자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하는 상황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나를 무조건 사랑하게 되는 경우보다 더 큰 희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사르트르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달고 있다. 타자의 선택은 절대적인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것이다. '선택'은 타자의 자유를 함축하는 말이지만, '절대적'이라는 말은 상대방이 한 번만 나를 선택하고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어떤 조건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어느 조건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나를 선택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나본 사람 중에 상대적으로 잘생겨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상대방이 무심결에 던진 이런 말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들이 우리를 그토록 화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에 대한 사랑을 철회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상대방은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이제야 분명해진다. 조건이 달라졌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정신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조건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기를, 다시 말해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기'를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아닐까? 상대방은 자신의 자유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아니 정확히 말해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현재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가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버리는 것 역시 그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소망 이면에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불길한 직감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타자란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멋진 지옥 아닌가? 한때는 즐겨 앉았던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난다. 의자는 더 이상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의자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반성할 수가 없고, 따라서 이런 불행한 상황을 자유롭게 벗어어날 수 없다. 반면 자유를 가진 타자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관심이 줄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언제든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우리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고뇌의 나날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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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사르트르, 「존재와 무」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 강신주. 사계절








+ 이렇게 사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가끔 내가 더 사랑한다는 마음이 왜 앞서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우리가 아직 서로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때, 이제 막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할 즈음에 서로가 서로에게 물었던 듣고 싶지 않은 동시에 미치도록 궁금한 그 어떤 것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과거의 비교급일 때 내가 어떤 문장들에 조금 마음이 쓰리고 아직까지도 계속 기억하고 있는 이유에는 이런 게 있었다. 만나본 사람 중에 어때서, 어쩌고 저쩌고 라는 것이 단서나 조건이 된다면 그게 바뀌지 않는 영속성을 지닌 나의 습관이나 본성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사람은 언제나 변하는 존재이니까 내가 그렇게 된다면 또는 더 나은 상대가 나타난다면, 이라는 생각의 끝에는 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자유랄까 마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만은 절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경우 이번만큼은,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기적과 같이 바랐다. 그래서 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구태여 기억이 나지도 않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 문장으로 만드는 동안 우리는 지난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씁쓸한 것도 한 편 안도감이 든다. 살아있는 동안 절대적인 선택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에 너를 만났다는 사실만이 현실이고 우리의 의지인 동시에 전부이기 때문에. 그런 말들에 대해서 숨기는 것도 바라지 않고 너무 많이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비교급으로 말해도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에 대한 설명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것, 을 잊지 않고 슬픔에 빠지고 싶지 않다. 즐겁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함께 갈 수 있는 그 끝까지 같이 가는 것. 상대방이 지닌 자유 앞에 우리는 무력한 타자이므로. 그 절대적이고 불가능한 소망 앞에 가장 근접해서 우리는 살을 맞대고 있는 것이기에 놀랍다. 그래서 타자란 치명적이지만 멋진 지옥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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