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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위로

제대로 살게 도와준다.

김곰곰 2012. 12. 4. 00:58

우리는 아이히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아렌트가 직면한 문제였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베버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분업화와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구조화된 사회이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일인지 반성할 틈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지적했던 것처럼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략) '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윤동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중간생략)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 사유의 의무 [예수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









메를로 퐁티의 말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 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 (중략) 사실 나 한 사람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수천 마리의 닭과 수천 마리의 물고기 등은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가족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타인들을 떠올려보자.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블라블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감수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른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 즉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결국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 [이정집], 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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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틈, 을 갖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기. 더불어 김수영과 윤동주가 위대한 이유를 새삼 깨닫자면, 그래서 윤동주는 한줄기 바람에도 괴로워했겠지. 살기가 힘든데 시는 쉽게 쓰여진다고 힘이 들어했겠지. 생각하는 삶, 자각과 연대. 

 철학서나 심리학 도서를 읽을 때마다 내가 절절히 느끼는 것은 어쩌면 교과서적인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문학이야 말로 위대하다. 문학만이 위대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같은 의미로 음악도 그림도 위대하다. 하지만 나는 듣는 귀가 낮아서 이만큼 절절하게 깨달을 수 없다는 것 뿐. 소설은 단순히 읽기물이 아니라 예술이고 인생이구나, 하는 조금은 오그라드는 한 줄이다. 

 어떤 경험과 성찰이 허구의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의 인생으로 우리의 삶을 위무한다. 철학을 읽을 때마다 소설책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문학을 예술로 칭하는 이유는 허구로 인간의 가치관이나 인생에 대해서 논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낀다. 허구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디에도 꼭같은 일이 없지만, 반드시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에.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하루키나 젊은 작가인 김애란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누군가 그렇게 아팠을 거라는 문장에 멜를로 퐁티의 선택할 수 있는 폭력에 닿아있고 즐겁게 사는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삶의 목적이라는 걸 이야기한 엔도 슈사쿠가 스피노자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 걸 알게 될때마다 작가라는 한 인간이 느낀 총체적인 삶을 느낄 수가 있어서, 그런 아픔은 세상에 한 사람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언제나 나를 위로해준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도와준다.

 삶에 대한 노력과 자각. 염치. 타인에 대한 진정한 배려, 잘못을 하고 엉망이 되어도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변하니까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쓴 약도 삼키고 꿈을 꾸는 것. 무엇이 되든 최선을 다해 태어나있는 동안 살아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