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안녕, 우리는 여름 나라로 갑니다.
밋밋하지만 좋은 일상. 부족한 게 많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있는 걸로 채우고 없는 건 가져다 쓸 수 있는, 그래서 메꿔지는 나날들. 그렇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엔 이 모든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면 어쩌지? 지금 첫 헬싱키를 읽고 있고 여전히 핸드폰을 보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읽을 것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먼저 생겼고 청결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먹는 것은 부족함이 없이 차고 넘쳐서 그것 외에 삶의 안락함이 더 중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할 일 본식 스냅 사진 셀렉 - 보내고 수정본 받기 필름 스캔 - 여행 가방에서 필름 꺼내기 부터 영어 공부 - 책은 오늘 가지고 왔음디카 인화 - 40매 정도 가능 / 본식을 뽑을까, 제주도를 뽑을까 제주도 생활 일자별로 정리 - ..
오늘은 11월의 첫 날. 새로운 달이 오고 간다는 실감은 전혀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려고 보니 새로운 달이다. 버스를 타고 명동을 지나는데 어느 새 백화점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다. 2016년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보게 될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11월의 실업급여는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여름 나라에 갈거라 가을, 겨울이 없는 올해를 보낼 거 같아서 서운했는데 일정도 밀리고 날씨도 빠르게 추워졌다. 덕분에 여름이 그립기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 더욱 긍정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춥기도 춥고 우리 동생도 보고 싶어서 오늘은 신랑과 친정에 다녀왔다. 엄마랑 동생이 산책 중에 데리러 나와주어서 편하게 갔고 아빠는 작업실에 가서 늦게 오는 바람에 우리 넷이 동네에 맛있는 족발을 먹었다. 입..
시댁에서 생활한지 꼬박 7일이 되었다. 4일은 집에 있었고 이틀 간은 친구들을 만났다. 두 번째 회사 친구들과 낮에 서촌에 만나 디미에서 그간의 시댁 살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점심을 먹었고 여전히 이름이 안외워지는 에스타르테 앤 릴렉스에 가서 퍼지 하나 커피 하나씩 시켜놓고 등받이가 없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남은 근황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봉은사에 가서 급하게 점심을 먹은 신랑이 와서 합류했고 열정적인 유노윤호 짤을 보며 화목하게 헤어졌다. 이것이 29일의 일. 생각해보면 그날은 비가 왔다. 친구들을 만나서 좋기도 했지만 엄마가 혼자 명동에 나와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뒤늦게 듣고 나니 마음이 안좋았다. 친구보다는 엄마를 만날껄 하고. 병원에 가서 할아버님 병자성사 받는 걸 보고 인사 드리고 신랑..
수학여행, 제주도 처음 오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인데다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아서 정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꽉 들어찼던 곳.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여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목탄 덩어리를 몇 개씩이나 다발로 세워논 것 같은 모양에 새파란 바다가 일렁이는 걸 보니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라서 신기했다. 높은 곳에서 트여있는 바다를 볼 수 있어서 멋지다. 목탄 느낌은 없지만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고 싶은데 이 곳이 많이 혼잡하다면 제주 신라, 롯데 쪽 바다에 가는 길도 비슷한 느낌이 난다. 예전에는 투숙객만 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에게 공개하고 있으니 여유롭게 그쪽을 산책해도 좋을 듯 하다. - SONY A7K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비오는 날 가면 좋다던 엉또 폭포에 갔는데 비가 안오면 물이 아예 없는 건천인 줄은 몰랐다. 시원하게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면 더 멋있었겠지만 우리가 있는 내내 비가 한 번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을 가도 볼 순 없었다. 물이 한 방울도 없는 폭포의 덩어리를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어떤 목표가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여유를 주는 것 같다. 타박타박 걷다가 길에 흐드러지게 핀 이 빨간 열매가 너무 예뻐서 내려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러 번 찍었다. 동네 아저씨는 뭐 이런 걸 찍으러 내리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셨지만. 가을이면 제주도 여러 곳에 피는 것 같은데 여기저기 있는데 이름을 모르겠다. -SONY A7K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서 8, 24 남편이 쓰던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어두운 방에 새근새근 남편 잠자는 숨소리를 듣고 누워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방의 천장이 무한대가 되고 장롱 위의 사소한 짐들이 어마어마하게 커보이고 책꽂이 가득한 대학 시절의 책들이 쿰쿰한 냄새를 더했다. 3-4일 정도 있으려고 들어온 시댁이니까 하얗고 말끔한 신혼부부 방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일정이 당분간 알 수 없는 무기한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덜컥 심란해졌다. 애초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는지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서 '대우�..
가기 전에 서울은 바람이 좀 차가워지긴 해도 빛은 여름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집으로 가는 창밖을 보니 울긋불긋 가을에 가까워졌다. 볕이 따뜻해지고 바람이 차가워지고 오후가 긴 느낌, 하늘도 풍경도 멀고 아득하다. 생각해보니 제주는 막히는 것이 없어서 시야가 넓었고 훨씬 자연과 가까웠던 거 같다. 두모악에서 본 80년대 말의 오름 사진은 지금 제주에는 없는 원시성 같은 게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비교하면 아직도 천진난만한 것 같다. 있을 때는 그 바다가, 저 나무들이 그렇게 가까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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