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지내던 생활과 날씨와 부족함까지도 그리워졌다. 그리워할만큼 정이 붙을만큼 오래도 아니었고 있는 동안은 내내 가족 생각에 갈팡질팡했는데 돌아와보니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외롭지만 천천히, 둘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이민이라는 생활 자체가 우리에게는 잘 맞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를 하는 것도 부담이 되기 보다는 즐겁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무언가 배우고 열심히, 잘, 한 번 더 치열하게 지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꽤 오래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치여살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직장 생활도 앞으로 몇 년간은 고생할 준비가 되었다. 바탕을 두고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성장해서 언제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한다. ..
시댁 쇼파에 누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주 큰 나무들이 보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참으로 만사태평하구나, 뭐 앞으로 어떻게 살진 몰라도 지금 이렇게 신랑이랑 쇼파에 걸터앉아 시원한 집에 있으니 참 좋다. 속이 타는 시어머니를 뒤로 한 채로 우리는 느긋하다. 더위에, 사람에, 직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보내는 한가한 여름이다. TV를 보니 맛있는 녀석들이 한다. 처음으로 티비로 보았다. 생각해보면 몇 년만에 티비를 보고 있다. 혼자 살 때도 결혼하고서도 계속 티비가 없었으니까. 마루에 누워서 티비를 보면서 딩굴 거리는 것도 하나의 오래된,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그 안에 우리가 있다. 우리 아빠가 좋아하는 양평해장국이네, 그렇지 저렇게 먹으면 맛있지 맞장구를 치다가 티비가 끝나고 이..
어쩌다보니 식물의 날. 오늘은 부지런을 떨고 싶은 날이어서 일어나자마자 씻고 빨래도 돌리고 시원한 쥬스도 한 잔 마시고 쓰레기도 잔뜩 가져다버리고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 가지를 쳤다. 너무 많이 자라서 머리가 산발이라 누렇게 말라버린 잎도 치고 옆으로 너무 많이 자란 잎도 치고 완전히 초록초록하게 만들어줬다. 바질페스토가 먹고 싶은데 생각보다 비싸서 바질을 키워보자고 생각한 지 며칠 째, 근처 꽃집을 두군데 정도 들러보았는데 허브는 안판다고 했다. 마침 오늘 양재에 갈 일이 생겨서 신랑하고 함께 꽃 시장에 다녀왔다. 꽃 시장 폐장 즈음에 가서 그런지 사람이 없는 건 좋았지만 꽃도 거의 없었고 허브도 찾기 어려웠다. 공기가 안좋아서인지 잎이 큰 나무들이 유행이라 그런지 스투키, 선인장 종류들만 가득..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2017년 여름 김애란 - 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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